부처골 탑골 미륵골 절골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신라인의 성스러운 산으로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봉우리를 필두로 동서면 양쪽에 수많은 계곡과 능선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 동남산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으로 탐방하면서 산재한 여러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부처골과 탑골, 미륵골, 절골로 이어지는 동남산의 매력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니다 보면 하루 해가 짧을 뿐이다.
맨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불곡마애여래좌상으로 부처골의 명칭을 가져온 보물이자 초기 불상으로서 큰 의의가 있는 마애불이다. 도로 옆 조그마한 공터에 주차 공간이 있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 바위 덩어리 한편에 감실을 파고 조성한 불상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참선하는 자세로 가부좌를 한 채 다소곳이 명상에 잠겨 있는 선승의 모습에 신비로움마저 감돈다. 바위에 굴을 파고 부처상을 조각한 불상으로는 유일한 마애불이라 찾는 이들이 많다. 미소가 인자하고 소박한 모습의 할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일명 할매불상이라고도 할 정도로 특유의 인상과 차림새가 친근감을 자아낸다.
불곡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면 잘 조성해 놓은 주차장이 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한때 육사 선생님께서 요양하셨다는 옥룡암(불무사)이 나온다. 이 절의 편액과 현판은 추사체로 패기가 넘치는데 영천 은해사에 걸린 추사 선생님의 실제 작품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을 모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룡암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우뚝 솟은 큰 바위가 나오고 무려 34점이나 되는 도상들이 사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를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탑골의 명칭을 붙인 삼층석탑이 숲 사이에 고즈넉하게 서 있고 주변에는 기단만 남은 흔적들도 보인다.
가장 넓은 면인 북면에는 두 개의 탑과 그 사이에 불상이 새겨져 있고, 탑 아래에는 두 마리의 괴수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탑 위에는 비천상이 불상을 향해 날고 있다. 동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고, 서면에는 보리수 두 그루와 깨달음에 이른 여래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남면에는 독립된 보살상과 마애삼존불이 보인다. 어떻게 한 바위 덩어리에 이렇게 많은 불상과 탑, 보살, 비천상, 보리수 등을 새겨 놓았는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신라인들의 불심과 예술의 향취에 흠뻑 젖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미륵골에 소재한 보리사다. 탑골 마애불상군 바로 인근에 있어 좁은 마을길을 지나가면 보리사 입구 언덕길이 나오고 넓은 주차장이 전망 좋은 자리에 조성되고 있다. 보리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왼쪽 가파른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보리사 마애석불이 멀리 낭산을 굽어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 통일신라의 마애불로서는 보기 드문 온화한 표정과 단정한 자세의 불상으로 돋을새김 기법으로 얕게 조각되어 보리사 경내의 석불좌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보리사 경내로 들어서면 왼편 언덕 위로 남산 석불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고 하는 보리사 석불좌상이 멀리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불좌상은 머리 부분이 커서 전체적으로는 다소 불안정해 보이나 광배 뒷면에 얕은 부조로 약사여래를 새겨 놓은 희귀한 불상으로 유명하다.
보리사 주변 불상들의 자비롭고도 경건한 자세에 마음을 가다듬고 내려오면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과 부속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죽 내려오면 통일전 주차장과 쉼터가 넓게 마련되어 있어 절골 탐방에 앞서 잠시 숨을 돌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절골 탐방은 신라 21대 소지왕과 관련된 전설이 담긴 서출지에서 시작된다. 서출지에는 조선 중기 풍천 임 씨 가문의 임적이 세운 이요당이 멋스러운 풍광을 만들어 내며 연꽃이 만발한 서출지를 빛내고 있다.
서출지에서 새로 잘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 남산사지 터에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3층 석탑이 눈에 띈다. 서로 모양이 다른 불국사의 두 탑처럼 남산사지의 동탑과 서탑도 서로 다른 양식으로 조성되어 모전석탑의 동탑과 전형적인 일반형의 서탑이 높이도 서로 다르고 기단도 특이하다. 남산사지 3층 석탑 바로 옆에는 임적의 동생인 임극이 세운 산수당과 원래 서출지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양피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양피 저수지에서 남산 입구로 더 들어가면 염불사지가 나오고 동서로 3층 석탑이 옛 정취를 풍기며 쓸쓸하게 서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염불사는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동서 두 탑은 모두 무너져 폐탑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2009년에 복원하면서 스리랑카국 공인 사리와 불상, 불경 등을 탑신에 함께 봉안하였다고 한다.
남산의 진면목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동남산의 여러 골짜기들에 산재한 불상과 석탑들은 신라인들의 경건한 불심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생생한 자취로 우리들의 심금을 움직인다. 불곡마애여래좌상에서부터 염불사지 3층 석탑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서 도보 탐방으로도 하루 해 정도면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좀 남는다면 헌강왕릉과 정강왕릉도 탐방하며 통일전도 잠시 들러도 괜찮을 것 같다. 신라 천년의 향기가 다시 천 년을 넘어 오늘에 전해지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서도 손색이 없는 경주 문화 탐방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Jun 5.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