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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대 Oct 08. 2021

풍요, 배운 고양이가 되다

풍요이야기

풍요가 <신사 자태>를 하고 고개를 위로 살짝 들어 올려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쳐다볼 때나, 누가 자기를 잡아가기라도 하듯 울타리 밑, 목 수국 그늘에 몸을 웅크리고 놀란 토끼 눈을 할 때나, 계단 밑 자기 집에서 배를 밖으로 드러내 놓고 천진하게 잠을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왜 그렇게 저려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냥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그 가슴 저림의 끝은 항상 나에게 잔잔한 미소를 짓게 했다. 

아마도 하나의 순진무구한 생명체에서 발산되는 한 줄기 빛이 내가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마음속 감정 하나를 살짝 흔들어 깨워 놓고는 재빨리 사라졌을 것이다.


풍요는 우리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둘째 딸은 출근하면서 먼저 풍요 집에 들러서 “풍요! 잘 잤어”하고 상냥하게 아침 인사를 했고 풍요는 한번 쳐다봐 주고는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렸다. 

둘째 딸은 풍요가 자기에게 무관심하게 대한다면서도 퇴근 후에도 꼭 풍요를 찾았다.

휴대폰으로 찍은 풍요 사진은 가족 카톡방에 올려졌고 큰딸과 막내아들은 풍요 사진을 자주 올리라고 아우성이었다.


아내는 여름 비에 계단 밑 풍요 종이 상자 집이 젖는다고 나무계단 틈을 메우는 작업을 직접 했다. 나는 시장에 가서 근사한 고양이 집을 하나 사 와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는 고양이 집은 종이 상자가 최고이며, 다른 집을 사 오면 풍요가 안 들어갈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종이 상자 하나가 어떤 생명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자신만의 공간이 된다.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함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풍요는 내가 사료를 줄 때마다 저만큼 떨어져서 사료 접시를 쳐다보다가 내가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나야 접시로 와서 사료를 먹었다.

내가 사료 접시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물러설 때까지 기다렸고, 내가 물러섰다가 접시로 다가서면 먹는 것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섰다.


처음 한동안은 풍요가 나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어서 그렇겠지만 서로 익숙해지면 장군이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살가운 사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풍요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야! 풍요. 니도 장군이 반만 좀 닮아봐라”

풍요가 이 말을 알아들었더라면 분명히 나를 몹시 싫어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와 비교되면서 평가절하될 때의 그 참담한 기분을 나도 잘 알면서도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장군이는 식사 요구에 대한 감사의 격식을 거창한 의례처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뒤편 텃밭에서 만났을 때가 그렇다. 장군이가 먼저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가고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뒤를 따른다. 장군이는 딱 두세 걸음을 걷고 뒤로 돌아서서 내가 따라서 오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또 두세 걸음을 걷고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우리 집 마당까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가야만 한다. 내가 추월하는 것도, 다른 길로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장군이가 달려와서 다시 앞서기 때문이다. 


장군이의 걷는 속도와 같은 리듬으로 짧은 보폭을 유지해야만 한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돌아서는 장군이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두 번 정도 부딪친 적이 있다. 그때는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장군아. 그냥 쭉~ 가자. 그렇게 안 해도 밥 주게”

뒤돌아 보는 장군이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풍요와 좀 더 가까운 거리에 있어 보기 위해서 궁리 끝에 접시에 사료를 담아두고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풍요가 스스로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배고픈데 지가 안 오고 배겨”하는 고약한 심사였다.


풍요는 한동안 나와 사료 접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에는 망설이는 걸음으로 접근해 와서 사료를 먹기는 하는데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도록 엉덩이는 뒤로 빼고 목은 앞으로 뺀, 내가 보기에도 아주 불편한 자세로 사료를 먹었다. 앞다리 양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도 힘들었다.


내가 앉은 자세에서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리면 후다닥 뒤로 도망가곤 했다. 그러면 내가 멀리 떨어져 주었고 풍요는 다시 사료 접시로 돌아왔다. 풍요는 사료를 다 먹으면 곧장 돌아서서 계단 밑 구석자리로 들어가서 신사 자세로 얌전히 앉아있곤 했다. 고양이가 아니라 겁 많은 토끼처럼 보였다. 


한 번은 아내에게 “풍요가 늘 혼자 잘 있는데 심심하지 않을까?”하고 물어봤더니 호랑이도 고양잇과이며, 그래서 고양이는 당연히 제왕의 기질이 있으며,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3단 논법으로 설명해 주었다.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토끼처럼 보이는 풍요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후일 나는 풍요에게서 

제왕의 근엄한 표정을 읽게 되었다. 

겁쟁이 풍요


풍요가 식사 때마다 나와 풍요 사이에 사료 접시를 두고 똑같은 실랑이가 매일 반복되었다. 나도 끈질겼고 

풍요도 끈질겼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풍요가 사료 접시에 스스럼없이 오기는 했지만, 경계심은 여전히 늦추지 않았고 내가 

사료 접시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기라도 하면 여전히 흠칫 놀라면서 몸을 뒤로 빼곤 했다.


아내는 풍요가 사료 접시에 스스럼없이 와주는 것만 해도 당신과 아주 친해졌다면서 풍요에게 더는 뭘 바라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람 손길을 전혀 타지 않은 풍요가 장군이처럼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아내의 이야기에 수긍했고 “장군이 반만 닮아라”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게 되었다.


풍요가 식사를 할 때는 사료 접시 앞에 잠시 앉아 있다가 풍요가 놀라지 않게 조용히 몸을 움직여 일어서 

나오곤 했다.

편안히 식사할 수 있도록 잘 모셔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풍요를 우리 집 울타리 밖으로 다시 내쫓아 버릴까 하고 고심한 날이었다. 풍요 대신 상냥한 강아지 한 마리를 마당에 들일까도 생각했다. 아마 삽살개 한 마리를 키워보지 않겠느냐고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을 즈음일 것이다. 


내가 사료를 한 줌 쥐고 접시에 놓으려고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풍요가 한쪽 앞발로 사료를 든 손을 순식간에 스치듯 할퀴는 것이었다. 엄지손톱 윗부분 피부가 커터칼로 베인 듯 예리하게 그어졌고 핏물이 스며 올라왔다.


상처로 인한 아픔보다는 배신감에서 분출되는 분노가 앞장서 뛰쳐나왔다. 

“이노무 새끼”하고 버럭 큰소리를 치자 풍요는 눈만 껌뻑거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으면서 나머지 사료를 접시에 담아주고 결연히 일어섰다.


나는 아내에게 “장군이는 쥐도 잡아서 갖다 놓고 온갖 재롱도 다 부려서 안단테네 사랑도 듬뿍 받는데 도대체 저놈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건방지기까지 하다"면서 그동안 풍요에게 품었던 기대감이 불만으로 바뀌면서 드러내 놓고 풍요를 비난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우리 마당에 강아지나 한 마리 키울까? 아니지 그러면 풍요가 같이 못 있고 우리 집에서 나가야 할 텐데”하면서 그래도 풍요 걱정을 하는 체했다.


아내는 “아이고. 됐습니다. 나도 한번 손등을 긁혔는데 그런 것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풍요가 우리 집에 있는 것만도 좋은 거죠” 하면서 “고양이한테 뭘 그리 바라는 게 많아요?”라고도 했다. 

고양이한테 뭘 바라지 말라는 말을 두 번째 듣게 되었다. 

아내는 풍요가 야생으로 자라서 본능적으로 먹이를 낚아채려는 것이니 풍요를 잘 이해해 주라고도 당부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풍요가 사료 접시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 “앉아!” 하면서 풍요 눈을 쳐다보면 신사 자세로 반듯하게 앉아서 기다려 주었다.

사실 내 말투가 좀 강압적이기는 했다. 

사료를 접시에 다 담아서 앞으로 살짝 내밀면서 “먹어!”라고 하면 맛있게 먹어 주었다. 


나도 풍요를 길들였겠지만, 풍요도 나를 길들였을 것이다. 

서로 길들어야 둘 다 한 울타리에서 매일 얼굴다운 얼굴을 맞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못 보면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서로 길들인다는 것은 각자의 세계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정해 주는 만큼 자신의 세계 또한 넓어질 것이다. 


그러던 풍요에게 없던 습관이 하나 생겼다. 식사 때 사료를 접시에 담으려고 하면 가끔 “하악!”하고 소리를 

내면서 이빨을 드러내곤 하는 것이다. 

“저 이래 봬도 무서운 고양이예요”라고 괜히 허세를 부려보는 것인지, 아니면 “아저씨. 사료 좀 빨리빨리 담아 주세요”하고 채근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사료 봉지 채로 접시에 부어 주었지만 나는 봉지에 손을 넣어 한 줌씩 3번에 걸쳐 천천히 나누어 담아 주기는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요 녀석! 어데 하악거리노!”라면서 풍요를 바라보면 네발을 꼼지락거리며 앉은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눈을 껌벅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순진하고 귀여울 수가 없었다. 


풍요는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그 버릇을 차츰 고쳐 나갔고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하~”하고 입을 벌리다가 재빨리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황급히 입을 다물면서 “악!”소리는 뱃속으로 삼키는 것을 여러 번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도 웃었고, 아내도 웃었고, 둘째 딸도 “우~ 하하하” 웃었다.


풍요도 예의를 아는 <배운 고양이>가 되었다. 


풍요와 민들레 꽃


언젠가 둘째 딸이 동네 산책에서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 마당에 있던 개가 얼마나 무식하게 짖어 대는지 <못 배운 개> 일 것이라고 했다.


언어가 마술이 될 때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도 심각한 이름을 붙이는지, 아니면 유머스러운 이름을 붙이는지에 따라 그 상황을 인식하는 감정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날은 둘째 딸이 부린 언어 마술 덕분에 많이 웃었다. 


나도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유난히 짖어대면서 용감함을 과시하는 녀석들도 있고 깡마른 소리로 짖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녀석도 보았다. 그리고 짖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녀석도 딱 한 마리 있었다.

아마도 <배운 녀석> 일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도 나중에 예쁜 새끼를 여러 마리 낳은 후에는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짖었다. 옆에 있는 예쁜 새끼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당연히 짖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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