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정말 우연한 기회로 첫 수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의 한 사회적 기업에서 제안이 들어와서이다.
학생은 4명이다. 나이는 50대 1명, 60대 3명이다. 성별로 따지자면 여성 1명, 남성 3명이다.
수업 이름은 <인생산책, 그림책 자서전 쓰기>이다.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고 10쪽 내외의 그림책 형식으로 자서전을 만드는 수업이다.
매주 한번 2시간씩 아홉 번 진행할 계획이다.
30여 년간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 보았지만 누군가를 대상으로 기간을 정하여 가르쳐본 경험이 없었기에 첫 수업 전날 긴장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게 되었다.
하지만 퇴직 후 2년 가까이 홀로 텃밭 가꾸기를 전업으로 삼아온 탓에 새로이 외부활동을 하게 된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감으로 아침을 맞았다.
퇴직 후에는 잘 입지 않았던 와이셔츠를 모처럼 꺼내 입고 양복저고리를 걸쳤다.
왼손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첫 수업은 나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자서전 쓰기 수업을 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좀 굳어 있다고 느껴졌지만 환한 미소를 짓고 그분들을 바라보면서 수업 일정표를 1장씩 나눠 드리고 난 후,
"한 분씩 성함과 함께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더 활짝 웃었다.
첫 수업의 어색함을 감추는 방법으로는 환한 미소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한 분이 말씀하셨다.
"선생님 성함부터 먼저 이야기 해보쇼. 그래야 우리가 선생님을 제대로 부를 거 아니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제가 깜빡했네요. 하하하"
나의 왼쪽에 앉은 연세가 가장 많아 보이는 분이 먼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하시고,
그리고 또 한 분, 한 분, 한 분.
모두 네 분이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마쳤다.
과거의 이야기였다. 한 시점에 아로새겨진, 잊혀질 수 없는 이야기.
그것은 예고 없는 찰나였고, 신체 건강한 선남선녀들이 그 찰나 이후부터 생사를 가르고 절망과 비탄으로 몸부림치는 날들을 겪어야만 했던 이야기였다.
네 분 모두 웃으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불의의 사고로 척수장애를 지니게 되신 분들이다.
휠체어에 의지해서 수업에 참여한 우리 반 학생들의 미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나라면 저분들처럼 고난을 이겨내고 웃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은 왠지 술이 당겼다. 아니 술이 땡겼다.
옛 직장 동료를 만나 소주를 한잔 했다.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대단한 분들을 만났다. 선생으로 갔다가 학생들에게 도로 배우고 왔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몸 안 다치고 하루하루 밋밋하게 그냥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사는 기라.
행복하게 살라꼬 이것저것 찾아 헤멜꺼 하나도 없따."
그분들이 지나온 고된 삶의 깊이를 어찌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마는 박범신 작가의 시 하나가 떠오른다.
'명주바람'이다.
명주바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을 이른다고 되어있다.
그분들에게,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에게 두 번째 수업 때 읽어드리고 싶다.
보드랍고 화창한 미소를 지으며 읽어드리고 싶다.
<명주바람>
당신의 남은 매일매일
빨래 널기 좋은 날이면 좋겠다.
그럼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