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가야의 제어구 [參]
판비는 함유가 말 그대로 판의 형태인 것이다. 이 판비는 구조상 표비 등 다른 재갈에 비해 기능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아무래도 함유가 판의 형태로 딱 막혀있기 때문에, 재갈 관절부분이 유연하지 않은 점이 그렇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판비의 함유는 귀금속으로 제작되거나 장식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즉 장식성이 상당히 강조되는 기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판비 역시 실제로 말의 입에 물려 사용하는 실용 재갈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명품차를 사거나, 차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여 장식을 하는 것처럼 판비는 기능성을 조금 떨어뜨리고 장식성을 강화한 실용기라고 할 수 있다.
판비는 선비와 삼연,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다. 아마 신라와 가야의 판비도 북방 판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의 표에 색칠한 부분이 판비에 대한 내용이다. 고구려와 선비·전연의 공간에서 4세기 초엽부터 판비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오른쪽 도면을 보면 그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직사각형이나 사다리꼴의 고리가 달린 횡타원형의 함유가 가장 많이 보이고, 고리가 없는 횡타원형의 함유와 클로버형의 함유도 확인된다. 2-2·4의 경우 판에 투조를 가했는데, 이것은 환판비와 상당히 유사하다. 2-3·6이나 3-9 같은 경우는 확실히 장식성이 강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역의 판비들보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확인되는 것으로 보이는 신라·가야지역의 판비들은 김해 대성동 41·42호분와 경주 월성로 가-13호분 등에서 출토된 사례를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래도 서기 4세기 후엽에는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2]는 초기 판비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인데, 판형 함유의 가운데를 뚫은 뒤 그것을 가로지르는 금구를 부착하여 함외환과 인수내환을 연결하도록 하였다. 김해 대성동 2호분 출토품과 같은 X자형 함유금구 판비는 마치 환판비를 닮은 것 같지만, 환판비는 더욱 노골적으로 고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초기 판비들은 [그림 1]의 북방지역 판비와 꽤 비슷하게 생겼다. 처음에는 이렇게 비슷한 것들이 제작되다가, 서기 5세기에 이르러 이것들이 영남 전역으로 확산되면 함유가 화려하게 장식되는 제품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함유의 재질이 금동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바뀌고 그 위에 십자문이나 용문, 인동문忍冬文 같은 다양한 문양들이 시문된다. 특히 〈황남대총 남분 단계〉를 지나면 신라에서는 심엽형心葉形 판비나 타원형 판비, 백제와 대가야에서는 내만 타원형 판비와 f자형 판비가 주로 사용되는 등 지역적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휙휙 뱉어버렸는데,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앞으로 마구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황남대총 남분 단계〉와 〈지역적 특색〉 혹은 〈지역성〉 등과 같은 표현들을 자주 사용할 것이다. 이것은 마구뿐만 아니라 신라와 가야의 거의 모든 물질문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들로 작용한다. 원삼국시대, 그러니까 진한과 변진의 제국이 존재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이른바 신라권과 가야권의 분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즉 다들 같은 형태의 물질문화를 영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기 3세기를 지나게 되면서 이들 지역 간에는 점차 각자의 개성을 가진 물질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학계에서 소위 경주식이나 김해식 등등으로 부르는 것들이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것은 변천을 거듭하면서 결국 서기 5세기 이후 확립되는 신라와 가야의 물질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앞서 언급한 〈황남대총 남분 단계〉, 그러니까 황남대총 남분이 축조된 시기부터 그 문화들이 뚜렷하게 분화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화려한 황금의 나라 신라가 탄생하게 되는데, 황금이나 금동 등으로 장식된 위세품들은 이도 모자라 비단벌레의 날개를 넣어 더욱 반짝거리게 된다. 반면, 이 시기를 지나면 가야는 백제와 교류를 하면서 상호 영향을 준다. 당대 가야는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세력이 재편되었다. 김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금관가야가 완전히 몰락하고 함안의 아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제국의 핵심으로 대두하는데, 이 시기 가야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교류하는 한편 호남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황남대총 남분 단계를 거치며 가야는, 신라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반도 삼국과 왜의 문화를 모두 수용하는 다양한 양상의 물질문화를 선보이게 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고대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HUB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 1]은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는 판비의 재갈멈치들이다. 가장 왼쪽의 원형은 중국 동북지역과 고구려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며 신라와 가야지역의 초기 판비에 이용되는 것들이다. 금관가야는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 마구의 도입과 함께 재지화를 시도하였는데 이들이 개발한 것이 두 번째, 제형 함유이다. 제형은 말 그대로 사다리梯꼴을 이른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심엽형은 사실 재갈뿐만 아니라 이후 나올 행엽이라는 장식용 마구에도 많이 보이는 속성이고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네 번째 타원형판비와 함께 주로 신라지역에서 많이 확인되는데, 물론 가야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내만타원형은 안쪽으로 굽어있는內彎 타원형이라는 말이다. 주로 대가야지역에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f자형은 f자 혹은 인테그랄∫을 닮았다. 이 함유들은 서기 5세기를 지나면서 귀금속으로 제작되기 시작함에 따라 화려한 색채와 문양들이 가미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