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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Mar 23. 2020

壹. 구석기시대 ㄷ

한국 구석기시대

3. 한국 구석기시대의 연구사와 주요 유적


1929년, 중국 북경北京 남쪽에 위치한 주구점周口店에서 북경원인猿人 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동북아시아의 구석기시대 연구가 본격화된 이후 1930년대가 되면서 한반도 내에도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다. 한반도 내에서의 첫 발견은 1933년에 이루어졌는데, 함경북도 종성 동관진에서 철도공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쥐의 이빨이 발견되면서 구석기시대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이듬해 모리 다메조森爲三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각종 포유류의 화석과 함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개중에 흑요석제 석기와 골각기가 발견되면서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소수의 소형 석기와 다수의 골각기가 출토되는 양상은 중국의 고향둔顧鄕屯유적과 유사한 양상이기 때문에 구샹툰유적을 발굴했던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에 의하여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고고학 연구를 주도했던 일본인 연구자들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구석기시대에 대한 후속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 구석기시대 주요 유적 분포


한국에서 구석기시대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해방 이후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1962년 나선 굴포리의 신석기시대 서포항패총 아래층과 1964년 공주 석장리의 금강변에서 주먹도끼 등의 유물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1978년 연천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1980년대 이후 충주댐과 주암댐 수몰지구에서 단양 수양개유적을 비롯한 후기구석기유적이 발견되는 등 수많은 발굴 성과들이 현재까지 축적되고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이 상원 검은모루동굴·단양 금굴·공주 석장리 하층·연천 전곡리 하층 등이다. 이 유적들의 형성 시기에 대하여 대개 30만 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르게는 100만 년 전, 늦게는 4만 년 전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온성 동관진유적 출토 석기


한반도 출토 주먹도끼 종류(좌: 공주 석장리유적 출토 주먹도끼 / 우: 파주 가월리유적 출토 아슐리안 주먹도끼)


고인류의 경우 아직까지 한반도에서는 호모 에렉투스 전의 화석은 발견된 바 없다. 승리산사람·용곡사람·황주 청파대동굴 출토 인골 등 한반도에서 출토된 고인골은 거의 호모 사피엔스, 혹은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해당한다. 다만 평양 대현동유적에서 발견된 역포사람이나 덕천 승리산유적 하층에서 발견된 덕천사람은 형질적으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이전 인류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역포사람은 두개골의 형질과 동반된 동물화석 등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어, 한반도 출토 인골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덕천사람 인골은 어금니 2점과 쇄골 1점이 나왔는데, 어금니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이 확인되는 반면 쇄골에서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의 특성이 확인된다. 물론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에 출현한 이후 단선적으로 진화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기에, 한반도 유적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나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곧바로 연결짓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진화과정을 단계로 나누었을 때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그 이전 단계에 해당하는 한반도형 고인류가 한반도에서 확인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반도의 고인류


남한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류 흥수아이 역시 호모 사피엔스로 판단되었다. 흥수아이는 동아시아 고인골 중 전신이 온전히 남은 유일한 사례인데, 석회암 바위 위에 하늘을 보고 반듯하게 뉘어진 채 발견되었으며 주변에는 꽃을 꺾어 흩뿌린 흔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의 매장의례를 알 수 있는 명확한 증거로서 주목받았다. 아울러 흥수아이 주변에 뿌려진 꽃들은 진달래나 국화의 일종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석회암지대에서는 자라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에 망자를 위해 장송의례인 헌화를 위해 다른 지역에서 꽃을 구해올 정도의 의례가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다만 최근 흥수아이의 발견 정황과 인골의 특성을 놓고 이것이 조선시대 이후의 인골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흥수아이의 정체에 관해서는 후속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흥수아이를 구석기시대 고인골로 보지 않는 견해의 근거는; 곡물 섭취 이후에나 발생할 수 있는 충치가 있다는 점, 홍적세 층에 매납된 다른 고인골과 달리 화석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발견 당시 인골 출토 지점이 통행로로 이용되는 공간이어서 안정된 층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 제기되었다.


흥수아이 인골


4. 한국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과 유물조합


구석기시대는 앞에서 보았듯 기본적으로 전·중·후기로 구분하는데, 한국의 경우 중기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희미하다. 한국에서는 전기에 해당하는 찍개나 주먹도끼 등의 석기류는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서구 구석기시대의 중기에 해당하는 접합석기는 후기에 해당하는 석인석기류와 거의 동반하기 때문이다. 무스테리안식 석기만 출토하는 층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우 얇고 사례가 빈약하다. 즉 출토한 석기 하나만을 놓고 중기식이니 후기식이니 하는 분류는 할 수 있더라도, 한국 구석기시대에서 하나의 단계로서의 '중기'를 설정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한국의 구석기시대에서 전기와 중기의 구분은 사실상 석기의 변화로써 나눈 것이 아니라 서구 고고학의 분류안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 때문에 유적의 시간적 위치를 확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기실 한국 구석기시대의 석기 출토 상황만을 가지고 보면 찍개-주먹도끼 조합의 대형석기가 제작되는 전기에서 박편(조합)석기-석인석기 조합의 소형석기가 제작되는 후기로 전개되며, 그 사이에 박편(조합)석기를 주로 하는 과도단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가정대로 한국의 구석기시대를 크게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눈다면, 전반기에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제작한 주먹도끼와 찍개를 위시하여 주먹자르개·주먹찌르개·긁개·다면석기 등의 중대형 석기가 주로 나타난다. 주먹도끼는 이른바 아슐리안 석기로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한 이래 모비우스학설의 직접적인 반례로 주목받았지만, 그 형태를 보았을 때 서구에서 출토하는 전형적인 아슐리안형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으며 유물의 동반관계나 연대에 있어 상이한 모습을 보이므로 동아시아의 주먹도끼는 그 정체성에 대하여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이 시기 석기의 주요 재질인 석영과 규암은 한반도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견고하고 날카로운 가공면을 만들기 쉬워 구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렉 보웬이 수습한 후 그린 주먹도끼 도면


하지만 이 석재들은 입자가 큰 불순물이 다량 혼입되어 있고 절리節理를 형성하며 떨어진 부분이 많아 정교하게 설계된 도구를 만들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소형의 박편석기와 석인석기가 제작되는 후반기가 되면 흑요석이나 혼펠스, 셰일과 같이 입자가 작고 연한 석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확인되는 석기는 이전 시기의 주먹도끼 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슴베찌르개를 비롯하여 새기개·밀개·뚜르개 등 크기가 작고 자루와 조합해 사용해야 하는 기물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세석인의 경우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동부와 아메리카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므로 호모 사피엔스의 확산 경로를 시사하는 유물로서 주목받는다.


한국 구석기시대의 석기 변천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韓國考古學事典』.

김원룡, 2008, 『韓國考古學槪設』(제3판), 일지사.

이상희, 2018, 「흥수아이 1호는 과연 구석기시대 매장 화석인가?」, 『한국상고사학보』 100, 한국상고사학회.

장용준, 2019, 「구석기시대」, 『교류와 교통의 고고학』,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회, 2015, 『한국고고학강의(개정신판),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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