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구석기시대
3. 중기 구석기시대
서기전 25~20만 년 즈음이 되면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가 새롭게 등장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alensis·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와 공존하고, 석기 제작에 있어서도 새로운 공정이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 근교의 르발루아Levallois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어 르발루아기법으로 명명된 이 공작은 아슐리안 공작으로부터 발전된 기술로 생각되며, 필요와 용도에 따라 그 크기와 형태를 설계하여 몸돌을 정교하게 다듬는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복잡한 공정을 거치면서 몸돌의 전면을 정교하게 다듬기 때문에 가공이 완료된 몸돌은 마치 거북이의 배갑背甲과 같은 형상을 띤다는 특징이 있으며, 떼어낸 격지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전기구석기시대의 석기 제작 공정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르발루아기법으로 제작된 핵석기核石器와 박편석기剝片石器는 본래 몸돌의 형태 그대로 재조합도 가능하므로 이를 접합석기 혹은 도구복합체Tool Kit라고 일컫는데, 이러한 석기조합이 노골적으로 발견된 것이 프랑스의 르무스띠Le Moustier 바위그늘 유적이었으므로 이것을 표지유적으로 하여 무스티에문화, 혹은 무스테리안Moustériens문화라고 명명하였다. 초기에 제작되었던 박편석기는 둥근 타원형의 평면을 갖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나 점차 가늘고 긴 직사각형의 첨두기尖頭器가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는 격지를 떼어내는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생겨난 변화로 짐작된다. 핵석기의 경우는 이전 시기의 긁개와 주먹도끼가 조금 더 정교한 형태로 제작되며 이와 동시에 손잡이칼이나 톱날석기와 같은 새로운 기종이 추가되었다.
서기전 4만 년 즈음에는 이전의 르발루아기법이 더욱 발전되어, 더 작고 날카로운 돌날을 제작하는 후기구석기시대가 도래한다. 시간과 공간에 따른 석기양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단계구분이 상당히 세밀한데,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작고 날렵한 석기를 복잡한 공정을 통해 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특히 프랑스를 중심무대로 한 문화들이 표지로서 작용하는데, 그들 중 대표적으로 꼽히는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페리고디안Perigordian과 오리냐시안Aurignacian문화,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되는 샤텔페로니안Châtelperronian문화이다. 페리고디안문화와 오리냐시안문화는 무스테리안문화에서 기원하여 발전된 것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편석기보다 더 얇고 작은 석인석기石刃石器가 제작되며, 무스테리안 석기가 거의 소멸하고 새기개Burin가 등장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페리고디안문화가 프랑스의 토착문화로서 뷔름Ⅱ기에 등장하여 Ⅲ기까지 영위된다면, 오리냐시안문화는 외부 유입 문화로 생각되며 뷔름Ⅲ기 초엽부터 페리고디안문화와 영 다른 특색을 갖추게 된다.
샤텔페로니안문화는 오리냐시안문화와 같은 단계이며 특질도 비슷하지만, 문화 영위 주체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점과 넓적한 손칼형 석기가 특징적이다. 중기구석기시대의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두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호모 사피엔스의 오리냐시안문화를 모방하여 기왕의 무스테리안문화에서 발전시킨 것이 샤텔페로니안문화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으나, 이것 역시 앞의 모비우스 학설과 같이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에 비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편견이 작용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세 문화 모두 무스테리안문화를 계승했으며, 서로 다른 문화 영위 주체가 상호 교류를 통해 유사한 형태의 문화를 구축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라베티안Gravettian문화인데, 앞의 세 문화와 함께 오리냐크 혹은 페리고르로 통칭되기도 한다. 특히 페리고디안문화로 명명될 경우에는 앞의 세 문화를 하층 페리고디안문화로, 그라베티안문화를 상층 페리고디안문화로 명명한다. 다만 샤텔페로니안문화가 하층 페리고디안문화의 범주에 들어가느냐에 대하여서 현 학계는 회의적이다. 등장 자체는 하층 페리고디안문화와 거의 같으나 그들을 압도하고 더 오래 다른 특색을 가지며 지속되었다. 골각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상아로 구슬을 만들어 치장하거나 나체 여인상Venus figurines을 제작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음으로 대두하는 솔루트리안Solutrean문화는 상당히 짧은 시간 동안 존속했으나 그 특징만은 두드러진다. 일단 석기 제작 방식이 독특한데, 플린트석flint stones을 가열한 뒤 갑자기 냉각시켜 파편을 떼어내었으며 형태도 상당히 아름답게 디자인하였다. 특히 의식과 연관된 도구로 생각되는 유엽형柳葉形의 양면찌르개는 솔류트리안문화를 상징하는 표지유물 중 하나인데, 이렇게 독특한 석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부은 긁개나 무스테리안형 석기가 제작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처음으로 바늘귀를 뚫은 바늘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정교한 바느질, 나아가 의복 제작이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뷔름Ⅲ기 말엽에 등장한 원시 솔루트리안문화에서 계승되어 뷔름Ⅳ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문화적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이 문화를 영위하던 집단은 그 유명한 라스코동굴의 벽화를 그린 주체들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막달레니안Magdalenian문화는 앞의 페리고디안문화나 솔루트리안문화와 유사한 점도 있으나 계승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후기구석기시대 특성상 격지를 이용한다는 점은 같아 얇은 긁개와 뚜르개, 새기개, 쐐기 등의 석기 조합을 갖는다. 대개 뷔름Ⅲ~Ⅳ기 사이의 빙간기와 빙하기에 확인되며 얇고 긴 형태가 특징인 막달레니안형 세석기가 제작된다.
위에서 살펴본 구석기시대의 전체적 흐름에서 몇 가지 변화상의 특징이 파악된다. 표면적으로는 제작되는 석기의 크기가 점점 작아진다. 이것은 단순히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만큼 물질문화를 영위하는 방식이 다채로워지고 도구 제작에 대한 인간의 사유가 성숙해짐을 의미한다. 즉슨 도구의 크기가 작아짐과 발맞춰 도구의 형태와 예상되는 기능이 다양해지게 되었고, 이것은 곧 인간의 도구 사용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르발루아기법 등장 이후 도구 제작에서의 효율성이 극대화되는데, 이는 곧 하나의 몸돌에서 추출할 수 있는 도구의 수가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전기구석기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하나의 몸돌을 이용하여 하나의 찍개와 주먹도끼를 만드는 데 그쳤다면, 중기구석기시대 이후에는 석기 제작 이전에 충분한 기획과 설계를 거쳐 타격을 조정함으로써 하나의 핵석기와 다수의 박편석기를 추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기구석기시대가 되면 핵석기보다는 격지를 이용한 석인석기가 주가 되므로, 더 많은 양의 실용석기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韓國考古學事典』.
김원룡, 2008, 『韓國考古學槪設』(제3판), 일지사.
한국고고학회, 2015, 『한국고고학강의(개정신판), 사회평론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