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석기시대 개관 / 신석기시대 문화권역
1. 개요
신석기시대는 호모Homo속에 해당하는 여러 종이 범람하던 시기를 지나 사피엔스종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배경 위에서, 충적세의 시작과 함께 개시되었다. 간석기磨製石器를 제작하며, 한 지역에 정착하여 마을을 만들고 원시적인 농경을 시작하는 시대적 특성이 인정되어 존 러복에 의해 '신Neo'석기시대로 따로 분류되었다. 이후 고든 차일드Vere Gordon Childe는 이 문명적 전환을 '신석기혁명The Neolithic Revolution'이라 칭하였다. 신석기시대의 개시는 원칙적으로 간석기의 등장을 고고학적 지표로 삼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간석기와 별개로 신석기시대를 특정할 수도 있다. 기실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착과 농경의 물적 지표는 간석기보다 토기가 더 적합하며, 한국과 일본 등 실제 신석기시대를 토기의 개시와 연결시키는 사례가 존재한다. 당연히 신석기시대의 개시점은 지역마다 상이하며 문화권역 역시 동아시아니 유럽이니 하는 거대한 스케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앞서 언급했듯 동북아시아의 경우 토기를 신석기시대의 지표로 보지만, 토기가 비교적 일찍 등장하는 연해주나 일본 동북부지방은 홍적세 종말 이전에 제작된 토기가 등장하므로 모호하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위의 사례와 달리 토기의 등장을 개시기로 잡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를 띠는 토기 즉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의 시공간적 특성으로 인하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기나, 신석기문화가 한반도 전역에서 등장하게 되는 가정 등을 명확하게 규명하기에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 신석기시대 전기의 개시점은 서기전 5천 년 즈음으로 고정되어 있어 구석기시대 종말로부터 7천 년에 이르는 간극이 있는데, 고산리유형이 발견됨에 따라 그 사이를 메울 수 있는 개시기의 설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산리유형은 오로지 제주도에서만 확인되었으므로 이것이 한국 신석기시대의 개시기 문화 전체를 대유할 수 있는 유형이라고 확언하기 어렵다. 반면 신석기시대의 종말점은 서기전 2천 년이나 1천 5백 년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비교적 분명하게 상정된다.
구석기시대와 다른 신석기시대 인류의 생활양상은 일단 군집 이동을 종료하고 촌락 정착을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착민들은 이른바 움집이라 하는 수혈주거를 축조하였으며, 주거 안에 화로를 설치하였다. 주거의 군집은 곧 촌락이 되는데, 모든 주거 관련 유적이 정기거주의 흔적은 아니다. 그러니까 장기 거주를 위한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고 그 외에 생계나 자원획득 등을 목적으로 임시적인 필드캠프를 구축하기도 하는 것 같다. 촌락의 규모는 주거 수 동의 소규모로부터 수십 동에 이르는 대규모까지 다양한데, 특히 대규모 촌락은 중기 이후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촌락의 수 자체가 급격하게 소멸하는 경향을 띠는데, 이어지는 동시기대가 되면 입지를 달리 하여 촌락의 수가 증가한다. 생계방식은 기왕의 수렵채집경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알려져 있다시피 새롭게 원시농경이 추가되었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로 생각되며, 그 이전까지는 어로를 위시한 수렵채집경제에 대부분 의존한다. 신석기시대혁명으로 인한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 도구조합에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특기해야 하는데, 정착과 함께 흙으로 용기를 빚어 사용하게 되었고 땅을 파는 굴지구 등의 초보적인 농기구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2.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역
신석기혁명 이후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되면서 물질문화의 복합도가 높아지고, 거주 공간에 구속되는 정착민 집단 사이에서 교류로 인한 연결망이 형성됨에 따라 물질문화에도 국지의 지역색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토기는 잘 깨어져 생산-폐기의 주기가 짧고, 아울러 여러모로 휴대성이 현저히 낮은데다 대개 식기나 저장용으로 사용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시공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대개 고고학에서 문화의 시공간을 분류할 때 토기를 지표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신석기시대 역시 그러하다. 토기를 이용하여 나눈 신석기시대 한반도의 문화권역은 연구자들마다 상이하지만 광역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다만 한국 신석기시대 자료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해 시기를 관통하는 고정된 권역을 설정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다.
신석기시대 초창기의 경우 모든 자료가 제주도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아직까지는 남부권 외에 다른 권역을 설정할 수 없다. 조기가 되면 패총·토기·어로구를 지표로 하는 물질문화상이 한반도 동·남해안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제주-남해안지방의 남부와 동해안지방의 중동부에 패총유적이 밀집한다. 이외에 압록강 하류와 두만강 하류에 극소수의 유적이 확인되며 이는 각각 북서부와 북동부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기가 되면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중서부지방에도 문화권이 형성되면서 한국 신석기시대의 전체적인 문화권역 분화가 완성되어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후 이 권역들을 중심으로 유적 분포가 점차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중기 이후부터는 중·남부지방의 토기문화가 상호 교류·전파를 이루며 거의 같은 맥락으로 변천하는 양상이라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들 모두를 통합해 보기도 하지만, 권역마다 공유하는 세부 양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후기 이후로는 북부지역에 뇌문이 나타나는데, 이는 중국의 채도를 기원으로 하며 농경문화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빗살무늬토기 등장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된 한국 신석기시대문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크게 다섯 권역을 무대로 전개된다. 의주 미송리·염주 반궁리·용천 신암리유적을 지표로 하는 북서부지방, 나선 서포항유적을 지표로 하는 북동부지방, 온천군 운하리(궁산)유적을 지표로 하는 중서부지방, 양양 오산리·지경리유적을 지표로 하는 중동부지방, 그리고 부산 동삼동·영선동·김해 수가리유적을 지표로 하는 남부지방, 이렇게 다섯 권역이 한반도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간분류이다. 이 분류는 한국고고학회에서 저술한 『한국 고고학 강의』의 지역구분 즉 서북·동북·중서·영동·남부내륙·남해안권역과는 상이한데, 남부내륙권역과 남해안권역은 토기 형태에서 타 문화권역과의 비교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을 보이므로 하나의 문화권역으로 두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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