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이름

by 이새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개학.
선생님들도 3월의 첫 주가 두려운 개학 증후군에 시달린다니, 학생이던 시절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던 사실이다. 매년 맞이하는 연례 행사지만 새학기 새로운 교실에 처음 입실할 때마다 낯선 연안에 닻을 던지는 듯한 막막함은 도무지 덜어지지 않는다. 긴장된, 설레어 하는, 더러는 무심한 수십 개의 시선을 받으며 태연을 가장하는 내 떨림을 학생들이 알아차리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


일 년 농사의 성패가 달린 급선무는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일이다. 분명 첫 학교에서까지만 해도 한 두 시간 만에 힘들이지 않고 익혔던 것 같은데, 세월 탓인지 이마저도 갈수록 쉽지 않다. 그래도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환하게 불이 켜지는 얼굴들을 보면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처음 몇 년 간의 좌충우돌을 겪고, 나름의 경험적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섣부른 범주화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가령 이러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학생은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이러이러하게 행동할 것이다, 라는 식이다. 이런 일반화가 많은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들어맞기도 하고, 혹여 문제 행동을 하더라도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편리함과 맞바꾼 평균율의 대가는 작지 않다.


개인적으로 작년은 담임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절감한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손댈 것 없이 이미 반듯한 아이들이 있어서 뿌듯했는가 하면,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이나 소관을 벗어난 어려움에 무력감을 느꼈던 적이 더 많았다. 그 아이들을 모두 졸업시킨 지금에 와서야 그 다름의 모양새를 왜 조금 더 오래 매만져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나의 경력이 쌓이고 옳음에 대한 기준이 확고해질수록, 아이들의 개성마저도 어느샌가 정정해야 할 오류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급에서든 수업에서든 그 뾰족한 모서리에 내가 상처받기 전에, 표준화된 탁월함의 준거에 맞춰 재빨리 재단해 버리거나 때로는 못 본 체한 적도 있다. 그 개별성을 끝내 지켜주지 못한 것은 나의 전문성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애초에 교사의 전문성이란 것이 임용 성적, 이수한 직무 연수의 시간, 교직 경력, 대외 활동 여부와 같은 기준으로 정량화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해가 지날수록 가르치는 일이란 마음의 수심을 측량하는 지난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때로는 나 스스로의 마음을 재는 그 척도의 눈금이 세밀해 질수록 좋은 교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 느낀다.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처럼,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일이란 언제까지나 불가능함을 알지만.
그래서 좋은 교사는 아이들의 모든 다름과 모서리마다 이름 짓고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의 미숙함과 아이들의 미숙함이 부딪히며 모난 곳이 둥글어지기도 하고 어쩌면 새로운 모서리가 생겨나기도 하겠으나, 그것 또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겠다. 설령 서로가 완벽한 원으로 다듬어지지 않더라도 괜찮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올해의 나는 덜 상처받으며, 더 다정하게 아이들의 모서리를 헤아릴 수 있는 교사가 되길 기원해 본다. 사랑이라는 다름의 이름으로.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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