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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들

기억을 사는 전화

단편소설

by 새현

“기억을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악한 음질과 노이즈, 그 뒤로 딱딱한 어투를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스팸 번호로 표시되진 않아 받은 참이었다. 그런데 저런 어이없는 말을 한다.


“기억을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며칠 후에 똑같은 전화가 왔다. 막 퇴근을 하고 돌아온 참이다. 현관에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두었다. 그리곤 안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면 타성적으로 거울을 가장 먼저 뒤집어 놓게 된다. 지금 내가 무슨 모습일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마 사람보단 말라비틀어진 짠지에 가까울 것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난다. 짧은 손톱으로 단추를 푸는 일부터가 성가신데, 하나하나 풀 때마다 커피 냄새가 올라왔다. 전화가 걸려 온 게 그때다. 처음에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밑져봐야 본전이다. 오늘은 하소연이 하고 싶다.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파는 거에요?”

“팔고 싶은 기억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끝인가요?”

“네, 결제와 상품 이관은 통화 종료 후 주무시는 동안 진행됩니다. 받으실 금액은 기억에 따라 상이합니다. 또 환불은 불가하니 이 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묘하게 디테일하다. 스팸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었나? 상관없다. 나는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


“평소처럼 나왔는데 지하철이 고장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추워죽겠는데 중간역 플랫폼에서 20분 넘게 기다렸어요. 덕분에 회사에 늦었죠. 그래서 과장님한테 깨졌어요. 제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것도 아닌데. 지하철이 고장 나는 건 거의 자연재해잖아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누가 저한테 커피를 엎질렀어요. 세탁비는 받긴 했는데,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것도 일이잖아요? 덕분에 오늘 오후 내내 커피 냄새를 풍기면서 일했어요. 커피 냄새를 좋아하는데 계속 맡으니 끔찍하더라고요. 저녁밥에는 머리카락이 들어있었어요. 새 음식을 받긴 했는데 입맛이 이미 뚝 떨어져서 세 숟가락 먹고 식당에서 나왔어요.”

그렇게 한바탕 말을 쏟아내는 동안 들리는 거라곤 불규칙한 노이즈 뿐이었다. 상대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끝낸 후, 나는 다음 절차를 기다리며 침묵을 유지했다.


“파실 물건은 이게 끝일까요?”

잠시 기다리자 건너편에서 말을 꺼냈다.


“네, 끝이에요.”

“알겠습니다.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폐사는 고객님에게 45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며, 상품 이관은 언급했던 대로 주무시는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거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뚝,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절차는 놀랄 만큼 간단했다. 거기에 45만 원? 정말이라면 횡재긴 하다. 곱씹어보니 말투 때문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이것도 재능에 어울리는 직업이라면 직업일까? 됐다. 그 전화에 대해 더 생각해 봤자 얻을 건 없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것만으로 기분이 풀렸다. 그것만으로 득을 본 셈이다. 어쩐지 배가 고파왔다. 저녁 얘기를 해서일까?




잠에서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했고 몸도 가벼웠다. 낯선 감각이다. 한국인의 질병인 만성피로는 나 역시도 피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면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말이 와닿는다. 하나가 가벼워지면 자연히 반대쪽도 가벼워진다. 이런 감각이 어색하다는 게 참 묘하다. 어제 일찍 잤었나 생각해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제의 일 중 기억나는 건 이상한 스팸 전화가 시키는 대로 기억을 팔았다는 것뿐. 피식, 웃음이 났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그런데 왜 정말로 기억이 안 나지? 술 마셨었나? 그러다 시계를 보았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씻은 후 화장대 앞에 앉았다. 책상 한쪽에는 화장품들이 바르는 순서에 따라 정렬되어 있다. 반대편에는 팔뚝만 한 길이의 거울이 서 있다. 화장품 더미와 거울 사이의 흰 벽에는 기린 사진이 붙어있다. 난 어려서부터 기린을 좋아했다. 이 기묘하게 생긴 점박이 동물을 보고 있자면 부모님과의 몇 안 되는 추억이 떠오른다. 유치원을 다닐 때, 부모님이 나를 동물원에 데려다준 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 둘은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둘은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우리 가족은 친척들의 빚까지 끌어안아야만 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도와줘야지, 라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군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일을 늘였을 뿐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기린의 외형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한참을 우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속 보다 보니 괴상하게 여겨졌던 목은 얇고 기다래서 예뻤다. 그때부터 사진으로라도 기린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부모님과 함께 동물원을 간 적은 없다. 대신 여유가 생길 때마다 혼자라도 동물원에 찾아가 한참 기린을 보고 있곤 했다. 오늘은 특히 약효가 잘 든 것 같다. 아파트를 나서는 길에 우편물 하나를 보았지만 당장은 출근이 급했다.


밤의 엘리베이터는 차근차근 층을 올랐다. 우편 봉투에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나의 이름 석 자와 주소지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봉투부터 뜯자 안에는 현찰이 두둑이 들어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돈을 세보자 정확히 45만 원이었다. 말도 안 돼, 그게 진짜였다고?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앉았다. 앞에는 45만 원을 부채꼴로 펼쳐놓았다. 손가락이 메트로놈처럼 똑딱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돈들을 모아 쥐고는 서랍장 안에 넣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통해 봐두었던 옷들을 주문했다.




며칠 후에 그 전화가 다시 한번 걸려 왔다. 여전히 딱딱한 축의 말투다. 하지만 어조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팔지 고민했다. 이윽고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마술스러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도 궁금했지만 이에 답을 해줄 것 같진 않았다.


“기억의 가격은 어떻게 책정되는 거에요?”

“인상 깊은 기억일수록 더 높게 책정됩니다.”

“인상 깊은 기억이라뇨?”

그녀는 말 그대로예요,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사무적인 미소를 짓고 있을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상력은 자연히 목소리와 말투를 가지고 그녀의 모습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코는 각지고 오뚝하게. 보조개는 없지만 쌍꺼풀은 있다. 속눈썹은 길게 뻗어있다. 눈은 찢어진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몽글몽글하지도 않다. 눈동자에 생기는 불어넣지 않는다. 머리는 장발일 것이다. 앉아서 일을 하고 있을 테니 묶을 필요는 없다. 맨날 같은 사람이 전화를 하는 걸 보니 혼자 하는 사업일까? 어쩌면 사람마다 담당구역이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유로운 복장을 한 채 홀로 방 안에 앉아 전화를 거는 여자의 모습을 상상했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편한 복장 대신, 움직일 때마다 걸리적거리고 매번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정장으로 갈아 입혔다.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을 그려놓고, 그사이에 칸막이도 쳤다.


“이 일은 혼자 하는 일이에요?”

“네, 맞습니다.”

나는 막 그려놓았던 풍경들을 쓱 지웠다. 그랬더니 편한 복장을 하고 수화기를 든 여자 한 명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더 자세히 얼굴을 조각해보려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팔 기억이 없으십니까?”

묘하게 보채는 듯한 말투다. 절대 이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불쾌한 기억을 떠넘겨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상상력이 이렇게 뛰어났던가? 어떤 응대원이더라도 전화를 받은 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있으면 마음이 급해질 것이다. 특히 이런 직업은 시간이 중요하다.


“오늘은 없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전화를 걸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나는 잠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핸드폰 화면 위로 02-로 시작하는 번호가 찍혀있긴 했다. 하지만 뒤의 일곱 자리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연락처가 어떻게 되나요?”

“연락처는 따로 없어요. 아무 번호나 누르신 후, 수신음이 끝나기 전에 기억을 팔고 싶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 그런가요?”

“네, 다른 문의 사항이 없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럼, 연락 기대하겠습니다.”

뚝,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끝났다. 한참 동안 그녀와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전화가 걸려 오지도 않았고, 내가 먼저 찾지도 않았다.




불을 끄고 새카만 커튼을 내리면 그제야 먹방이 된다. 빛을 없애도 소리는 남는다. 집 안 어딘가에서 작게 웅웅, 하고 소리가 들린다. 전기가 연결되어 있고 전원이 켜져 있으면 뭐든 소리가 난다. 잘 때 성가실 정도인데, 사람들에게 이해를 해주지 못한다. 이 말을 하면 거의 ‘너가 너무 예민한 거야.’라는 투의 대답이 돌아온다. 잠에 들기 위해 누우면, 자연히 생각하게 된다. 정말 내가 예민한 걸까? 하지만 난 들리는데……., 나는 몸을 뒤척거리며 아주 천천히 잠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자주 악몽을 꾼다. 어느 날의 꿈에서 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학교의 벽은 상흔이 가득할 정도로 낡고 오래되었다. 인기척을 느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나는 회중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아는 사람들도 나왔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느껴진다. 다리와 손이 떨릴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곧 사방에서 말과 물건들이 날아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내리자 입고 있던 와이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몸의 통증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거친 숨을 내쉬며 이불을 안을 살펴본다. 나는 피도 흘리지 않았고 상처도 나지 않았다. 몸은 꿈에서 겪은 일에도 긴장을 한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근육이 풀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몸은 어떨 땐 뇌보다 빠르고 어떨 땐 뇌보다 느리다. 이미 잠은 다 잔 거나 마찬가지. 비척거리며 일어났지만 정신은 말똥거린다.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냈다. 새벽에 뭐 먹는 건 그만 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손과 입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뇌 속에서 편린 하나가 반짝였다.


“그 전화 진짜였지……”

나는 혼잣말을 했다. 전화기는 항상 두 던 곳에서 있다. 충전기를 뽑자 반쯤 졸고 있던 전화기는 눈을 뜬다. 어쩌면 영업시간이 아닐지도 몰라, 이미 전화를 걸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녀가 알려준 대로 하자 금방 전화가 걸렸다.


“네, 기억을 사는 가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기억을 팔고 싶어서요.”

“어떤 기억이신가요?”

그 허접한 음질이 그렇게 반갑게 들릴 줄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오후나 저녁때와 같이 또박했다. 나는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


“주문은 잘 받았습니다. 곧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이런 시간에도 영업을 하시나요? 영업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손님, 저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24시간 연중무휴, 제 모토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단순히 영업을 위한 허세라고 여겼을 테다. 하지만 이 여자라면 정말로 가능할 것도 같다. 그녀는 발음부터 남달랐다. 인간보다 기계와 가까울 정도로 또박또박하다. 그녀는 이미 내 세계를 벗어난 인물이다. 무용한 고민은 그만하자고 다짐했다. 나는 남은 과자를 밀봉하고 양치를 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좀 오래 뒤척여야 했다.




피곤하다. 온몸이 근육통이 와 욱신거리고 눈도 시큰거린다. 어제 수상한 여자에게 먼저 전화를 건 기억이 있다. 차라리 가만히 누워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눈이 퍽퍽해서 시야가 온전치 않았다. 맹인이 앞을 더듬거리듯 벽을 짚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을 해야 한다. 냉장고를 열어 미숫가루를 타 먹은 후 씻고 옷을 입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무슨 기억을 팔았는지 떠올려보자고 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히려 머리가 하얘질 뿐이었다. 어쩌면 술기운에, 또 잠결에 중요한 기억을 팔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그만 고민하자고 결심했다. 나가는 길, 우편함에 봉투가 하나 꽂혀있었다. 이전과 같은 봉투다. 나는 그것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 길에 주먹을 몇 번이나 접었다가 폈다. 지하철 역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았다. 봉투를 열어보자 수표가 들어있다. 살면서 본 적 없는 금액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까지 막을 순 없었다. 뼈를 따라 단단히 솟았던 긴장감이 파사삭 떨어졌다.


‘그래, 그깟 기억 따위 알게 뭐람. 내가 중요한 기억을 팔았을 리도 없고.’

이 돈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니 설렜다. 갑자기 한 번에 쓰면 나라에 적발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봤다. 뭐, 실없는 생각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돈 나가는 구멍’ 에게서 전화가 왔다. 쳇, 아빠다.


“무슨 일이야?”

“잘 지내고?”

“돈 필요해서 전화한 거잖아. 무슨 일인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수술이……,”

“얼만데?”

“—”

“—? 내가 그럴 돈이 어딨어? 있더라도 내가 엄마한테 그 돈을 쓰겠어?”

“그래도 가족끼리의 도리가 있는데.”

나는 아빠의 말을 싹둑 자랐다.


“누가 보면 내가 패륜이라도 저지른 줄 알겠네. 됐어 끊어.”

아빠는 마지막으로 뭐라뭐라 말했지만 잘 듣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찝찝하다. 부모가 죽어도 눈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기억을 사는 전화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기억을 팔려고요. 아주 인상 깊으실걸요?”

“그런가요? 어떤 기억이십니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 말이 없자 수화기 너머에서 손님? 하고 되물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다.


“네 있어요. 시작할게요. 어릴 때 있었던 일이에요. —.——.———……,”

한참을 혼자 떠들었다. 그녀는 이제 끝이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적당히 숨을 고르자,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인상적이네요. —원에 구매하겠습니다.”

—원, —원이면 확실히 수술비를 대주고도 남는다. 수술 후 입원비나 약값을 지불하고도 충분할 것이다. 부모님에게 남은 수익이라곤 이제 국민연금뿐이다. 전화를 끊자 한숨이 나왔다. 세안을 하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꿈을 판 날엔 잠자는 도중에 잘 깨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한참을 뒤척여야 했고, 잠에서 여러 번 깨었다.


기타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성심당은 그냥 지나친다. 질린 지 몇 년도 더 되었다. 부모님이 사는 낮은 아파트의 외벽은 다 벗겨져 있다. 엘리베이터 모퉁이 한쪽에는 ‘정전 시킬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와 함께 손전등이 매달려있다. 성심당의 빵 맛은 적응이 되지만, 이 엘리베이터의 숨 막히는 좁음과 텁텁함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거울도 지저분하다. 관리가 제대로 되긴 하는 걸까?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분명 하얬을 플라스틱 호출벨에는 때가 잔뜩 껴있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 띵동-하고 소리가 났다. 집에 있으려나, 어쩌면 간병 중일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아빠는 집에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반가워했다.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어?”

“하루 연차 냈어.”

“자고 갈 거지?”

“내일 출근 해야 해. 잠깐 줄 거 있어서 온 거야”

나는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현찰로 꽉 찬 봉투는 곧 터질 것처럼 뚱뚱했다. 알아서 써, 하고 돈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금액을 본 아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번 건진 물어보지 말라고 선수를 쳤다.


“이제 갈게. 그거 주려고 온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밥이라도 먹고 가.”

“아빠 밥솥도 못 쓰잖아.”

“너가 좋아하던 거 해줄게. 재료 다 있어.”

이곳에 오기로 결심을 했을 때부터 이미 입맛은 뚝 떨어진 상태였다. 여기 더 있고 싶지도 않았는데, 식탁 앞에 잡혀버렸다. 아빠는 냉장고에서 포장된 반찬들을 꺼냈다. 이윽고 냉동실에서 얼어붙은 전들까지 꺼냈다. 그는 다시마, 멸치, 무 따위로 육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끓기 시작한 육수는 온 집안에 냄새를 풍겼다. 요리 실력이 늘긴 했네, 속으로 생각했다. 반찬 대부분은 가게에서 산 것이지만.


“마침 이밥을 해놨는데 잘 됐네."

아빠는 요리를 하며 혼잣말을 했다. 아빠는 곧 내게 밥과 전찌개를 내주었다. 전찌개의 느끼한 냄새는 고춧가루로도 막지 못했다. 해물로 만든 전에서는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이건 얼마나 오래된 전일까, 음식에서 나는 냉동고 냄새로 막연히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입맛이 있었더라도 썩 맛있게 먹진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 아빠는 마른반찬을 몇 개 더 내왔고, 계란후라이를 부치셨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음식을 마저 먹는 사이 그가 들고 온 건 사진첩이었다.


“맛있니? 전찌개 먹기 힘들잖아.”

“응? 뭐 그렇지.”

“너가 전찌개를 그렇게 좋아했어. 원래 명절 되고 나서야 먹는 건데, 너가 너무 좋아해서 자주 해줬었잖아. 식당에서 파는 음식도 아니고”

속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았다. 나는 대충 응, 응, 그렇지하고 대꾸했다. 아빠는 거의 혼자서 말을 쏟아붓듯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사진첩까지 들고왔다. 거기엔 웃고 있는 나와 가족들의 사진이 있었다.


“이때 기억나니?”

“응.”

“너가 글쎄, 동물원을 그렇게 좋아했단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산만하게 굴지도 않고…….,”

방금 한 대답은 거짓말이다. 내가 동물원을 좋아했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하고, 동물 똥냄새나 풍기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국을 몇 모금 했더니 압안이 텁텁했다. 나는 물을 들이켰다. 김치와 맵게 볶아진 멸치, 계란후라이를 먹었다. 아버지는 내 밥숟가락 위에 들깻가루에 무친 고구마 줄기를 얹혀주었다.


“너가 어릴 때 얼마나 반찬 투정이 심했는지를 아니?”

“어린 애들이 다 음식 가리지.”

“너가 야채를 안 좋아했는데 이건 그렇게 좋아했어.”

“그랬어?”

아삭함은 아직 약간 살아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짰다. 왜 모든 나물에 기름과 소금을 넣고 무치는 지 모르겠다. 속이 좋지가 않다. 사이 좋은 가족은 아니었다지만 이렇게 불편하다니. 나는 아버지의 말을 거의 흘려들었다. 그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밥을 절반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기어코 과일까지 깎았다. 입맛이 없어도 과일은 들어가지,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옆구리가 서서히 아파온다. 하지만 그는 내게 계속 무언가를 먹이려고 했다. 나는 결국 아주 천천히, 과일을 씹어먹었다. 씹을 때마다 사각사각소리가 났다. 아빠는 그 와중에서도 나의 어릴 적 이야기와 지금 어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하셨다. 사실 기억이 별로 나지가 않는다. 어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흥미도 없었다. 나는 대충 응, 응했다. 부모님은 20대 초에 날 낳으셨다. 그 후부터 부모님은 쭉 이곳에서 사셨다. 요의가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이 어디였지?”

“그걸 까먹니? 안방 옆이야.”

화장실은 정말 안방 옆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사 온 칫솔로 양치를 했다. 그리고 아빠와 헤어졌다.


기차를 타고 오는 길에 멀미를 했다. 억지로 밥을 먹느라 속을 버린 게 분명하다. 아 스트레스야, 집으로 푹 쉬어야겠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핸드폰을 하지도 않았고 쉽사리 잠에 들지도 못했다. 몇 시간 동안 그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답답하다. 빈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 지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깨어났을 때, 속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피로가 회복되었다는 느낌도 없었다. 호흡이 불안정하고 가슴에 이물감이 있다. 불쾌함을 품에 안은 채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냉장고에 있던 밥을 냄비에 넣고 물과 함께 끓이기 시작했다. 물에 반쯤 녹은 녹말 덩어리는 아무런 맛도 없다. 김치와 함께 억지로 먹었다. 반 그릇 넘게 남았다.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회사에서 동료 한 명이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건강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제 얼굴이 그 정도예요?”

나는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았다. 거기엔 한 명의 어른이 있었고 또 사회인이 있었다. 새삼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된 것 같다. 확실히 피부가 안 좋다.


“안색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생긴 거에요.”

“뭐, 그럼 다행이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대신 그날은 잔업을 하지 않고 바로 퇴근했다. 그냥 자야겠다고 퇴근길에 여러 번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이불을 덮었다. 이불로 몸을 꽁꽁 덮어보아도 어쩐지 안정감이 들지 않았다. 담요를 찾아와 내 몸에 한 장 더 올렸다.


며칠 후 ‘돈 나가는 구멍’이 또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아빠는 또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말을 듣다가 소리를 지르고 핸드폰을 던졌다. 핸드폰은 벽면에 부딪히고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침대에 앉아 씩씩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자 다행히 액정에 금이 가거나 깨지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화기 너머로는 계속 아빠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키패드를 눌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기억을 사는 상점입니다.”

여전히 사근거리는 목소리다. 그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웃음기를 띄고 있다.


알람 소리와 함께 아침이 왔다. 오늘은 어제보단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옛날에는 꿈을 자주 꿨던 것 같은데. 꿈을 기억한다는 건 잠을 깊이 못 잤다는 뜻이라던데, 혼잣말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나는 다시 출근을 해야만 한다. 아침의 공복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속이 헛헛하다.




주민등록등본을 뽑아오라는 은행원의 말에 나는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노인들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공무원들과 노인이 소통을 하는 데는 오래도 걸린다. 그들은 서로 답답해하는 모습은 꽤 웃겼다. 반면 서류가 나오는 시간은 무척 빨랐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 끝. 그럼 사무원은 금방 따끈따끈한 서류를 뽑아준다. 갓 나온 종이의 온도는 갓 구워진 빵의 온도와 비슷했다. 금방 나오는 종이 한 장 때문에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했다는데 짜증이 좀 났다. 서류를 위에서부터 쭉 훑었다. 父와 母라는 글자가 무척 생경하다. 하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난 두 한자와 그 옆의 이름을 보고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올라왔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기억을 파는 일이 점점 익숙해졌다. 서랍장 안에 현찰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잠의 질도 점점 올라갔다. 만성적으로 뻐근했던 몸도 점점 활기를 되찾아갔다. 한 직장동료는 요즘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요즘 컨디션이 좋네요, 하고만 대답했다. 불면증에 시다렸던 날들이 금방 아득해졌다.


나는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거래처와 미팅날이었다. 기다리는 짬 동안 동료와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좀 늦으시네요, 그가 말했다. 그러게 현수씨, 뭐 연락 온 건 없어요? 말이 끝난 직후, 문이 열렸다.


“아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감색 자켓을 입은 쪽이었다. 얼굴의 주름을 보니 상사인 듯했다. 그는 미안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나와 동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수는 서울 시내가 그렇죠 뭐, 하면서 함께 웃었다. 뒤이어 두 번째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 없이 느껴보았던 감각이 몇 달 사이에 생경한 것이 되어있었다.


“괜찮아요?”

그 자리의 사람 모두가 당황해 했다. 현수는 내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잠깐,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말을 똑바로 하기 버거울 정도로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안 흘리고 마실 자신도 없었다.


분명 거래처 사람을 보고 몸이 반응했다. 두 번째로 들어온 남자. 머리를 왁스로 떡칠하고 검은색 넥타이를 한 남자. 변기 위에 앉아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 속에 그런 남자는 없다. 나와 그는 초면이다. 변기 위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공항이 멎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축된 근육은 아주 천천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나는 주먹을 접었다 폈다. 긴장을 긴 숨과 함께 내뱉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반차라도 내세요. 제가 부장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

“죄송합니다. 좀 부탁해요”

현수는 흔쾌히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지하철에 탑승했다. 처음보다야 호전되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이 도시가 싫다.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다른 곳에서 살아 보는 상상을 했다. 역시 나는 세상이 싫다.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누운 채로 꼼지락거리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 침대 밖으로 던졌다. 방바닥이 엉망이 되었지만 치우진 않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편안해야 하는 집에서도 몸은 불편함을 느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슴은 원래의 박동으로 되돌아왔다. 그날은 또 전화를 걸었다. 제가 어떤 기억을 팔았었죠? 그녀는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그건 영업비밀이에요.”

말끝에서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응대원들이 으레 하는 사무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이전의 싱글거리는 웃음도 아니었다. 그렇게 감춰보고 싶었겠지만, 그 웃음소리에선 비린 냄새가 났다. 응대가 엉망이네, 하고 난 생각했다. 잠을 자다가 집 안을 뒤졌다. 바닥은 널브러진 옷과 서랍, 책장 속에 있던 물건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 집 안에는 일기, 그 흔한 노트 하나 없었다. 나는 옷과 잡동사니들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떨어야만 했다.




‘컨텍까진 내가 했는데……,’

내가 하던 업무는 슬쩍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납득할 만한 사안이었다. 진전이 많이 된 업무도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쑤었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은 나에게 안색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걔 중 누구는 퇴직을 해야겠다는 걱정 섞인 농담을 건넸다. 그럴 때면 난 적당히 웃으며 상황을 넘기곤 했다. 건강에 잠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 사실을 열렬히 체감하고 있었다. 잠을 드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깨는 게 문제다. 잠이 들어있다가 얕아져 램 상태에 들어가면 공황이 몸을 덮쳐왔다. 떨쳐보겠다고 몸을 휘둘러보지만, 떨어지는 건 덮고 있던 이불뿐이다. 그러다 숨을 고르며 채 방 안을 둘러보고 있자면, 가끔 커튼 사이의 틈이 보인다. 창밖으론 안광이 번뜩인다. 아직 깨어있는 아파트의 눈들이 두렵다. 그 미팅 날 후로 난 이렇게 살고 있다.


“저 해외여행 다녀와서 사진 엄청 찍었어요! 좀 보실래요?”

연차를 모아 오랜 휴가를 다녀온 동료가 말했다. 근처엔 다른 동료들도 모여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졸려서 단어를 많이 까먹는다.


“어디 다녀왔다고 했죠?

“네덜란드요.”

“아, 그랬죠.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출력한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뭔지 모를 것들이 잔뜩 있었다. 그녀와 동료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풍차가 진짜 많더라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풍차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단어만 까먹는 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집에 이런 물건이 왜 있나 의문이 들곤 한다. 화장대 앞에 있는 기린 사진은 떼버렸다.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볼 때면 쓸데없이 눈이 간다. 인테리어에 조화롭지도 않다. 그저 벽만 지저분해질 뿐이다.


출근하기 전, 화장을 마치고도 한참 거울을 마주 본다. 난 거기서 표정을 연습한다. 안색이 어둡다니 표정이 좋지 않다느니, 그런 말들은 이제 귀찮다 못해 따끔거릴 정도다. 화장품과 화장법을 좀 바꾸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밝은 톤 틴트를 볼에 찍어 바른다. 화사한 색깔을 쓰면 혈색이 좋아 보인다. 안색 정도는 화장으로 꾸밀 수 있다. 한 남자 직원이 말한다. 오늘은 잘 잤나 보네요? 성공이다. 참, 편하다면 편하다. 세상에 절반쯤은 이렇게 속일 수 있다.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홀짝인다.


“어제 야근해서 그런가? 괜찮아요?”

눈앞에 무언가가 상하로 움직였다. 퍼진 눈의 초점을 맞춰보았다. 손이다.


“예.”

“그래도 곧 프로젝트 끝나니까. 우리 조금만 더 힘내보죠?”

“예.”

“쉬게도 해주신다 했고, 보너스도 나올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

“예.”

아, 내가 왜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더라.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멍했다. 자고 일어났다는 표현은 애매할지 모른다. 눈이 계속 감기고 근육은 늘어진다. 그뿐이다. 머리와 심장은 지치질 않는다. 가슴이 텅 빈 것 같다가도, 터지기 직전의 만두처럼 팽만감이 들었다. 며칠째 방 안에 있었다. 이불이 무겁다. 이불 따라 몸도 눅눅해진 기분이다. 커튼을 열면 옅은 빛이 쏟아진다. 나풀거리는 먼지가 보기 싫어 이내 커튼을 여몄다 누워있는 내내 전화 수신음이 들렸다. 충전기에 꽂아두지 말걸……, 누구한테 온 전화일까? 회사일까? 알게 뭐람. 출근이니 회사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돈이 있어 봐야 쓸 곳도 없다.




머리에 힘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 생각이란 걸 하기가 어렵다. 침대에 앉은 채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 이 미묘한 감각은 뭘까. 문득 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튕겨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랍장 안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신분증을 확인한다. 거기엔 내 이름과 생년월일, 얼굴도 찍혀있다. 갑자기 몰아친 숨을 상대하기엔 목구멍은 너무 좁다. 겨우겨우 호흡을 내뱉는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거울과 주민등록증을 번갈아 보았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이질적인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그 전화. 내가 어디까지 기억을 팔았지? 그 순간 내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의 감각조차도 생경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지.”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핸드폰이라는 명사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화장대 옆 콘센트에는 충전기가 꽂혀있지 않았다. 어디지? 충전기의 단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콘센트를 빼고 어떻게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랍장을 뒤졌다. 젠장, 왜 이렇게 깊은 서랍장을 산 거야. 손의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은 탓에 물건들을 치우고 잡으려다가 몇 번 놓쳤다. 혹시 핸드폰을 버리기라도 한 걸까? 생각할 때쯤 책장 위에 사선으로 누워있는 핸드폰을 찾아냈다. 나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배터리는 남아있었다. 급히 키패드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또 뵙네요. 반가워요.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말에 비웃음이 서려 있다. 이젠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양쪽으로 찢어져 날카로운 눈 안에는 탁한 눈동자가 있을 것이다. 턱은 날카롭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갸름할 듯싶었다. 그녀는 옆으로 주욱 찢어진 입으로 말한다.


“기억을 되돌려 받고 싶습니다.”

“환불은 안 된다고 매번 말씀드렸는데.”

수화기 뒤의 여자가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우선 제 가게로 와보시겠어요? 주소를 알려드릴게요.”

나는 곧장 그녀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낡은 상가 안에는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다. 창밖으로 보니 불은 켜져 있었다. 끼이익, 녹슨 철경첩 소리. 안에는 아무도 없다. 분명 기분 나쁘게 생긴 여자가 있을 줄 알았건만. 그 대신 안에는 작은 매대와 유선 전화기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뚜-뚜-뚜-. 발신음이 멈추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는 거기에 대고 말한다.


“기억을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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