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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Oct 09. 2023

형이상학이 필요한 이유

성리학의 시작, 주돈이의『태극도설』을 통해

 형이상학은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게 대체 무슨 쓸모인가? 라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러한 폐단은 인문학에 대해 어느 정도 소양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철학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형이상학과 실천철학의 분류가 그것이다. 그들은 실천철학-내지 도덕철학-이 아니면 논의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의 근원이나 죽음 이후의 삶 등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곤 한다. 이런 설명은 어느 정도 타당하며 사실에 인접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의 목표는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있다. 때마침 역사에서 이에 적절한 예가 하나 있다. 유학의 한 분파인 성리학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천시해 왔다. 공자 등도 귀신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보단 보다 실재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허나 북송 시기부터 몇몇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체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성리학인데, 바로 형이상학이 함유된 유학인 것이다. 몇몇 학자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유학이 사상이 아니라 비로소 철학이나 학문이 되었다고까지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다. 왜냐하면 이 저작이 성리학의 시발점이며, 이후에도 성리학의 세계란 주돈이의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기 때문이다.




출저는 위키백과


 위의 그림이 바로 태극도이다. 이는 한 도학자가 그린 것으로, 이에 나름의 견해와 해설을 적은 것이 바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다. 맨 위의 원이 태극, 그 아래는 음양, 가운데로 화수목금토 등의 오행이 보인다. 그 아래는 각각 인간과 짐승등을 비롯한 자연물을 나타낸다.  내용을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1.     본래 태극이 있다.

2.     태극에서 음과 양이 비롯된다.

3.     음과 양은 기와 결합하여 오행이 된다.

4.     오행이 결합하여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온갖 것들이 만들어진다.

5.     그중 인간은 특히 영특한 기와 태극이 결합하여 생겨난다.


 『태극도설』은 1,000글자도 안 되는 텍스트 이기에-비록 한문이긴 하지만- 이렇게 짧게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태극의 파생물이라는 관점이다. 태극은 세상의 법칙, 이理, 서양 철학적 용어론 로고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만물에 동일한 원칙이 내재되어 있음을 함의한다. 인간의 성性 역시 태극과 일치한다. 이런 학설은 단순히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오로지 형이상학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도 답변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본성은 세상의 법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성性이라는 개념을 본성으로 치환하기엔 무리가 있긴 하지만, 해당 글에선 이 정도로 충분하다.-


 물론 이런 주장에는 그럼 인간은 어째서 악해지는가? 등등의 질문이 따라오긴 한다. 그럼 주돈이는 이렇게 대답할 성 싶다. 인간은 태극이 내재된 존재이고 가장 영특한 기와 결합한 것도 맞지만, 기와 결합하는 순간 한계가 생긴다고. 가령 생리학 욕망 같은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돈이는 욕망을 떨쳐내며 본성을 향하는 수양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유학자들은 어째서 형이상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가? 의외로 성리학 이전까지 유학이 중국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적은 없다. 물론 한나라 때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으며 국가 차원에서 사상을 정비하고 관료로 뽑긴 했다. 하지만 한나라 때도 그렇고, 이후로도 법이나 문화는 유학보단 도가나 법가적인 것에 가까웠다. 이것은 전술했듯 생의 기원이나 죽음 등에 대해 궁금해하는 인간의 본능과 상관관계가 있다. 하지만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전통 유학자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형이상학 없는 실천철학은 불가능하다.


 만약 ~~을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다고 해보자. 필연적으로 왜? 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전통 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무용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결코 저 주장에 납득할 수 없다. 어떠한 행위가 도덕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그것이 어째서 가치를 지니는 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도덕이란 결국 가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오로지 형이상학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철학이란 것이 결국 형이상학과 실천철학이 맞물리며 발전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많은 문인이 인식론이나 우주론 등을 도덕론과 함께 이야기하고 이론화한 행동들도 이러한 이유에 근거 한다. 철학은 서로 다른 분야라 할지라도 정합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유학이 성리학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철학으로 거듭났다는 주장은 이러한 생각이 근저에 있다.


 주돈이를 비롯해 몇몇 유학자들을 거치며 탄생한 성리학은 이후 중국의 국가이념이 되었고 동해를 건너 한반도에도 안착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단순히 법제화되는 것을 넘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유학의 형이상학적 전회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행동에는 이유가 필요하고, 그 이유란 바로 가치이며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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