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조라는 인물. 동정받을 자격이 있으면서도 비굴하고 비겁한 인간. 『인간 실격』을 두 번째로 읽고 나 역시 그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인물이란 걸 알았다. 『인간 실격』은 거울이 아니다. 밧줄, 사다리, 잠수정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이름 붙여줄 뿐이다. 요조라는 이름을.
『인간 실격』은 몇 년째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 중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납득’하는 독자들의 수는 썩 많지 않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의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내준다. 첫 번째는 예술 조차도 시장에서 유행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책의 이름값만 보고 책을 산다. 하지만 충분히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두 번째는 현대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행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누구나 고요함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하다보면 자기 안에서 살아숨쉬는 요조를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다.
정신병자의 삶을 깊이 탐구하는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인간 실격』은 주인공이 무척 중요하다. 사실, 주인공이 이 정도로 중요한 소설도 흔치 않다. -뭐, 주인공이 안 중요한 작품이 어딨겠냐마는- 즉 요조에 대한 이해가 독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감상이 어떻냐에 따라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요조는 깊은 관계를 두려워하며 자주 회피하고 도망친다. 어릴 때 하인들에게 겁탈당한 후 평생 반항다운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연민 받아 마땅한 인간임과 동시에 강간당하는 아내를 보고 도망치는 비굴한 인간이기도 하다.
필자의 추측에 따르면 그는 경계선 인격장애와 회피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 경계선 인격장애는 두 양가감정 사이를 너무 자주, 빠르게 오가는 정신질환이다. -보통 양가감정을 동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필자는 이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이는 분명 경계선 인격장애의 증상이다. 여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갈구 한다.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는 환자들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권태감과 만성적인 공허감, 불안감, 안정적이지 않은 인간관계, 충동적인 행동 등이다. 이는 심각한 양가감정, 즉 감정 기복에 의해 생긴다. 작품 내에서 이러한 정신병적 징후들은 여러 번 나타난다. 그가 하였던 행동 중에 가장 충동적인 행동은 아마 연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한 것일 테다.
이제 회피성 인격장애에 논의해야 한다. 그는 마치 광대와 같은 가면을 쓰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리고 그 가면을 통해서만 타인과 연결되고자 한다. 이는 경계선 인격장애의 증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회피성 인격장애의 징후기도 하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조차 진실된 나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계에서 얻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신병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정신질환이 선천적, 후천적 원인을 모두 따져봐야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인간실격』의 초반부에서 이러한 양상이 충분히 설명되어있다. 그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야할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뒤이어 아버지의 손님들이 집 안에서 하는 행동과 나오며 하는 행동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선, 혹은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그에겐 불가해한 것이다. 이들은 선천적인 요인이다. 어린시절 집의 하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도 암시된다. 이는 후천적 요인이다.
이후 요조는 세 명의 여인을 지나온다. 특히 마지막에 결혼까지 했던 요시코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한 남자에게 겁탈을 당했고 요조는 그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요조는 옥상으로 도망치고 절규한다. -이것 역시 회피성 인격장애의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시코는 너무나도 순수하였기에 겁탈당했다. 인간 사회의 위선을 이해하지 못하던 요조는 인간 사회에서 순수함조차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약에 빠지고 폐인이 되어 스스로에게 선언 한다. “인간 실격”
이 선언은 그가 폐인이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피상적 관찰에서 끝나는 이해다. 이 선언의 근거는 타인과 섞이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포기다. 그는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스스로 광대라는 가면을 쓰면서도, 대학생이 되어서는 공산주의자인 또래들의 심부름꾼이 되면서까지, 두 여인을 스쳐지나가면서 온갖 심리적 격정을 겪고 나서도 요시코와 결합되고자 한다. ‘순전함’이라는 미덕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이후 그는 숲 속의 병원에 갇힌다. 요시코는 마지막으로 그가 사용하던 약물들을 건넨다. 요조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받았을 때 거절한 최초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지 않는다. 저 거절은 이러한 심경의 물적 표현이다. 그가 끝내 선택한 것은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라는 허무주의적 선언이며 회피였다. 작품의 끝에서 마담은 요조가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글쎄, 비겁함이 악이 아니라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요조를 향한 깊은 연민을 느낀다. 반면 누군가는 그를 인생에서 결코 만나지 않고 싶은 부류라고 말한다. 작품 초중반부에서는 필자 역시 요조에게 연민을 느꼈다.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겪는 고난과 장애가 오로지 본인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우니까. 공감이라는 감정의 활동은 간주관적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서로간의 교집합이 있어야만 발생한다. 동일한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거나 흡사한 경험은 소유하고 있어야한다. 이러한 공감은 문학작품과 독자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내면의 성찰이 부재하거나 정신병적 징후의 경험이 부실하다면 요조에게 공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뒤집어보면 필자처럼 요조에게 공감을 느끼는 사람은……,
문제는 언젠가부터 그를 혐오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느 장면부터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깨닫게 된 이후 그러한 감정의 전환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에게 공감하기도 했고 연민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부덕을 갖춘 인물이다. 필자 역시 요조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결과적 측면에서 그처럼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다거나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타인과의 갈등을 두려워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 회피하듯 필자 역시 그렇다. 관계가 삐그덕거리면 이를 해결하기 보단 도망치기 바빴다. 아마 그 사람들은 내가 왜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 혼란스러웠을 성싶다. 걱정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잘못한 게 있을 지도 모른다는 괜한 죄책감에 빠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건 나의 죄다.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와 연결되겠다는 기대를 도저히 하질 못하게 되었다. 그닥 원하지도 않고. 언젠가 생길 갈등이 두렵기 때문이다. 갈등이 실제로 생기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문제는 생길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필히 미래에 갈등이 생길 것이고 스스로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예언,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함이다. 동반자살을 하거나 데릴사위 짓을 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요조와 필자가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진 못한다. 나 역시도 겁탈당하는 배우자를 두고 도망치고 그저 절규만 하기만 할 인간일 것이다.
요조는 추한 몰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더 싫었고 혐오스러웠던 이유는, 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스스로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요조가 싫다. 나는 나의 심연에 요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딱지를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