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민망한 고백이다. 이전에 「토니오 크뢰거」와 「인간 실격」의 주인공들이 경계선 인격장애일 거란 글들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이유는 나의 생각과 작품을 반추하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두 작품들에 유난히 이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동류를 향하는 동정심이고, 이기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같은 경계인이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 역시도 누구에게든지 동정을 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토니오 크뢰거」와 「인간 실격」의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썩 차이가 난다. 주인공이 같은 정신적 질환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읽고 받은 인상도 썩 달랐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인 요조는 파멸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내면으로 끊임없이 침전해 들어간다. 그리고 굴곡진 인생사를 거치면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절감한다. “인간, 실격”이라는 선언은 그러한 사고의 말로다. 이런 점에서 「인간 실격」은 내면적이고 자기패배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토니오 크뢰거」 역시 우수에 찬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는 요조처럼 스스로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예민하고 우울한 예술가다. 세속적인 시민세계를 경멸하는 동시에 사랑하며, 심미적인 예술세계를 사랑함과 동시에 그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여행길을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게 된다. 이 인정은 요조의 것과는 썩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모순된 내면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알을 깨고 나와 스스로를 극복해 보겠다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인간 실격」과 비교할 때 「토니오 크뢰거」는 외면적이고 자기극복적이다.
필자와 같은 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토니오 크뢰거가 되는 것뿐이다. 요조라는 인간상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맞이하겠다는 선언일 따름이다. 작품을 쓴 오사무 역시 독자가 그런 선택을 하길 바라지 않았을 터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