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본연한 적은 단 두 가지, 권태와 격정이다. 권태란 감정의 과도한 고요고, 격정이란 감정의 과도한 활동이다. 본래적 의미에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것은 결국 이것들 뿐이다.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현상임은 분명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그 중에서 권태로 인한 자살을 다룬다.
필자에게 이 책과 얽힌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20,30분 정도 늦을 것같다고 연락을 해왔다. 난 카페에 들어가 마침 가지고 있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을 꺼내 읽었다. 그 사람은 정말 30분 후에 딱 도착했다. 그리고 내게 농을 쳤다.
“그 책을 밖에서 읽고 계시니까 진짜 위험해보여요.”
좋은 농담이어서 나도 웃었다.
소설은 타인의 자살을 도움으로써 삶을 유지하는 인물-작중에서는 이름이 불리지 않고 ‘나’로 일컬어진다.-의 글과 독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글이란 자신의 고객들의 삶을 기록한 일종의 소설이다. 그는 끝내야할 때 끝내지 못하는 생을 너절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급부로 끝내야할 때 끝내는 생은 아름답다. 그는 고객들의 끝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일그러진 의무감을 지녔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여성은 셋이다. 유디트와 에비앙, 미미. 여기서 자살을 하는 여자는 유디트와 미미다. 특히 소설의 전반부에선 유디트, 후반바에선 미미라는 인물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 에비앙은 중간인 3장에 껴있는데 꽤 서운하겠지만, 그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유디트, 주인공은 그녀가 유디트를 닮았고 그 만큼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부르지만 본명은 세연이다. 그녀는 성적쾌락을 즐기고 퇴락적인 삶을 산다. 어떤 측면에서 즐긴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보이긴 한다. 그녀에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주문진으로 가던 중 그녀와 c가 타던 차는 폭설에 파묻혀버린다. 그 지루한 순간, 유디트는 차 안에서 한차례 자위를 한 후 말하길 “후, 멀리 다녀왔는데도 바뀐 게 없어.” 자살을 하기 전 그녀는 k와 c라는 두 형제와 엮인다. 유디트는 c가 자신에게 언제 넘어오는지 스스로 내기를 건다. 내기의 성패에 따라 누구와 함께 살지가 결정된다. 성공하고 유디트는 크게 웃는다. 그녀는 북극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도착한 곳은 결국 폭설에 묻힌 주문진이었지만……,
그녀와 몸을 섞었던 k는 택시기사다. 일하는 틈틈히 동료들과 돈을 걸고 셧다를 친다.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운행을 할 때에는 엔진이 분당 5000번 회전을 할 정도의 속도를 즐긴다. 심지어 손님을 태우고. 육욕과 스릴. 권태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저런 것들에 빠지곤 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그리고 서로를 부추긴다. k가 화투를 치는 동안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판돈이 가장 커지고 노름꾼들이 망설이는 이때, 일상의 권태와 나른함이 휘발해버린다……, 고스톱은 너무 느리다.” 권태로운 자에게 너무 느린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건 삶의 이유가 되어주지 못한다.
인생이 권태로운 것은 k의 형인 c도 마찬가지다. 유디트와의 담화 이후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인생이란 건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눈이 쌓여가는 차 속에서 유디트와 c는 몸을 섞는다. c가 사정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의 목을 졸라달라고 부탁한다. c는 그녀가 컥컥거리자 흥분을 해 사정을 하지만 동시에 목은 놓아버린다. 유디트는 불만을 토로한다. 너는 아무도 죽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c나 k나 마찬가지라고. 이는 아마 다른 사람을 통해 생을 끝내고 싶었거나, 남을 죽이지 못하는 부류에게서 어떠한 부정적 징후를 느꼈기 때문에 한 행동일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죽여주지 못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남을 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나……, 북극에 가고 싶다는 유디트에게 그는 말한다. 북극은 없어, 얼음덩이가 바다 위를 떠다느는 것 뿐이니까 아무도 그곳을 찾지 못하고 너도 그럴거야.
유디트는 자살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c다.
유디트의 이야기가 대략 마무리된 후, 소설은 3장을 횡단하여 유미미의 이야기로 향한다.
유미미는 행위예술가로 자신의 몸을 봇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녀는 비디오아트를 하는 c와 합작을 해보기로 한다. 어떤 합작이냐? 유미미의 퍼포먼스를 c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본래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촬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둘을 주선해준 큐레이터도 이에 놀라워한다. c가 생각하길 그녀가 자신과 몸을 섞었던 유디트와 닮았다.
미미가 자신이 촬영되는 것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시간과 함께 휘발하는 행위예술을 해온 것이다다. 그리고 ‘나’의 집에 널려있는 조화들을 보고 기겁하기도 한다. c와 ‘나’는 동일선상에 서있다. ‘나’는 자신이 죽은 이들을 소설로 남기고, c는 영상으로 자신이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을 포획하다. 둘은 본질적으로 동류다. 그는 자신의 취미가 나비를 박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유를 덧붙여준다. 아름다운 것을 포획하는 일이 즐거웠다고. 이러한 암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유디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뿐이다. 미미는 자살을 결심하고 ‘나’에게 돌아와 c가 자신의 구원이 되지 못했노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역시 구원자에 속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구원이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일까? 글쎄, -아마 전자겠지만- 중요한 건 미미 역시 따뜻한 욕조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미미가 죽기 전, c는 그녀와 k와 독대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촬영을 허가했는지 고백한다. 본래 자살을 할 요량이었으나 실패하자 자살조력자가 지금까지 거부했던 일을 해보라며 c에 대해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자살조력자는 미미가 자살에 대한 확신을 가지길 바랐을 테다. 이후 욕조의 거울을 보니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고 한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와 작업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영상이 되어 시간을 초월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왜 영상을 지워달라고 한 거야?” C가 묻는다.
“글쎄, 영원히 나를 복제할 수 있는 것 속에 담겼다는 게 두려웠다고 할까? 그리고 그게 다른 사람의 아닌 네 수중에 있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어.” 미미는 대답한다. 그녀는 결국 자살조력자의 수중에 빠진다.
K는 C의 전시회장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숨겨놨던 과거와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어릴 때 집에서 놨던 화재가 형의 수집품-나비-들을 태우다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K의 기억 속에서 그의 형은 자신의 안위보다 나비를 먼저 걱정했다. 그런 형을 보며 K는 두렵기도 했지만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빼앗기는게 익숙하다고 말한다. 유디트도 빼앗아가지 않았는가?
“신경쓰지마. 어차피 죽은 나비들인데.” C는 쿨하게 대답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유미미의 영상을 수 없이 돌려보았다. 모니터는 미미이자 유디트였다. 유디트든 미미이든, 죽든 말든 “신경쓰지마. 어차피 죽은 나비들인데.”
자살조력자는 건수가 하나 끝내면 훌쩍 여행을 떠난다. 고객을 찾을 때는 이렇게 묻는다. “멀리 떠나도 변하는게 없죠?”그는 조화 무더기 속에서 인생의 무료함을 느낀다. 그리고 뇌까린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게 없을까? 인생이란.
아마 ‘나’는 죽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살을 택할 정도는 아니다. 권태에 빠진 사람은 연초나 술, 연애나 섹스에 중독되곤 한다. 때론 자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들이 가져다준 쾌락이 잠시 높이 뛰었다가 사라지면 남는 것이라곤 자신의 삶이 권태롭다는 재확인 뿐이다. 이런 식으로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마치 깊은 못에 돌맹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 수면에 잠시 파동이 생기지면 이내 잠잠해진다.
그의 작업은 자신처럼 권태로운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자신이 이입할 수 있는 자들이 상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행위는 자해나 자살과 같다. 자신이 투영되는 사람을 선택하여 파괴하고 글을 써서 미화시킨다. 이건 일종의 박제이고 C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마치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려는 듯도 보인다. 그 작업이 사라진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평생 뿐이다. 저런 일시적인 쾌락도 없었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나타나는 현대인의 부정적 징후
권태가 현대인이나 도시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에게 가깝긴 하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20세기 이야기긴 하다.-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부정적 징후들에 대해 지적한다. 사람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이런 관계맺음에는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과 존재 자체를 수용하고 긍정하는 방식이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개인이 탄생하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훌륭하다는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심화되었다.
『소유냐 존재냐』에 따르면 현대인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권태를 해소하고자 한다. 소유의 문제는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C와 ‘나’는 -비록 과장되어있을 수는 있지만- 현대인의 전형이다. 유디트와 미미가 권태를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이 그녀들을 소유와 박제, 통제의 대상 따위로 보기 때문이다. 살아움직이는 인간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둘은 죽어야만 한다. C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있는 미미를 밤새 되돌려보고, ‘나’는 둘을 죽음으로 몰고가며 작품으로 만든다. 둘은 이런 방식을 통해 권태를 해소한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실존이다. 인간은 사랑을 가지고 살아있는 인간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죽은 인간과의 관계를 일시적이고 기만적일 따름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서 박제된 사람을 좋아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이렇듯『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게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을 여섯 번 째 읽었다. 나 역시 이들과 같은 인물이다. 단순히 유디트와 미미처럼 권태롭기만 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C와 ‘자살조력자’와 별 다를바 없는 인간이다 꺼림직하다. 나는 독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