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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an 02. 2024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고

소비자의 힐링과 위안을 위한 정신병의 상업적 소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가 방영한다는 광고를 보고 꽤 기대를 품었다. 필자는 ‘정신병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현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질병이 유머소재나 사회적 관용어가 되는 것은 환자들에게 가슴 아픈 일일 수 있다. 가령, 사회적으로 탈모가 희화화의 대상이 되었다던가, ‘암 걸린다.’라는 표현이 심하게 답답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관용어가 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정신병은 이러한 희화화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는 언급되지 못할 바엔 조롱거리라도 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병동을 소재로 한 TV연속극-OTT라는 매체를 이용하긴 하지만-이 나온다니 기대할 수밖에. 이런 드라마가 어느 정도의 대중적인 장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병이라는 소재를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다. 즉, 사회일반적으로 정신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최소한 사업가와 제작자들이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가 되었다는 의미다.


 구조와 형식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형식이나 플롯의 구조등은 여타의 한국의 TV연속극과 큰 차이가 없다. 소비자들이 흔히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운다. 그 인물들이란 주인공인 정다은을 위시로 한 간호사들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인으로 인해 정신병을 얻은 환자들-특히 작품 초중반부에 나오는 몇 명-이다. 환자들의 경우, 어머니의 과보호로 정신병을 앓은 여성,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가 정신병을 얻은 남성, 비행사라는 꿈을 품고 있지만 싶지만 성적에 문제가 있는 경계선 지능인 등이다.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 정도를 제외하면 소비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구성이다.


 그들이 상류층이라고 여기며 반감을 지닌 대상을 공격한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평범한 여성들이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좋은 사람과 이성애적으로 맺어진다. 상기의 형식에서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 최근 유행하는 주제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 주제란 힐링과 위로, 위안 따위이며 연대의식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 전달하는 것은 결국 그거다.  이러한  형식을 차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TV연속극은 예술이라기보단 유흥에 가까우며, 좀 더 본질적으로는 문화산업이고 상품이기 때문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문제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이 연속극은 너무 노골적이고 만듦새가 엉망이다. 특히 개연성이 심각하다.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싶지만, 너무 많으므로 굳이 이야기하진 않겠다. 생각하니까 또 열불이 솟을 정도로 많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작품의 초중반부에서 생리적인 이유로 주인공에게 피해를 주는 정신병자들과 후반에 나오는 정신병자들의 묘사가 썩 정합적이지 않다. 작품 내에서 앞뒤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초중반의 저러한 정신병자들은 정다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사과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정다은이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이유로 비웃는 환자들이 여럿 나온다. 한 둘이 아니다. 같은 입장의 정신병자들 여럿이 그렇게 행동할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제작자들은 정신병자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조명해 주려는 듯 굴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보니 그렇지 않았다. 환자들은 단지 주인공인 ‘정다은’에게 특정 상황을 부여하기 위한 기계적 요소로 취급할 뿐이었다. -환자가 자살하는 것도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요소일 뿐이었고.- 왜 제작진들은 태도를 바꾸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연속극의 진실성에 대해 호평했다. 이는 작품에 비판적이었던 시청자들도 일부 동의한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로 호평할 만한  진실성이 보이는가? 필자의 눈에 보이는 진실성이란, 시청자의 힐링이라는 가벼운 희열과 안도, 위안 따위를 위해 정신병자라는 약자들을 상업적으로 소모하려는 마음뿐이다.-개연성이 붕괴한 이유도 이런 노골성 때문으로 예상된다.- 물론 초반부에 독자들이 이입할만한 정신질환자 인물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비정신병자들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보여주긴 했다. 후반부 정신병자들에 대한 제작사들의 태도가 바뀌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고, 진실성이란 것도 빛바래버렸지만 말이다.

 



원래 드라마는 소설이나 영화등과는 작법에 많은 차이가 있다. 중간부터 작품을 보는 사람이 많고 호흡이 길다 보니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엿들어 사건이 전개'되는 등의 개연성 문제등은 납득할 수 있다. 스토리가 이해하기 쉽게 직관적이고 상투적으로 쓰이는 것 역시 납득할 수 있다. 재벌총수인 등장인물은 집 안에서도 양복을 입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란 것이 본래 상투적이고 상업적이다. 하지만 『정신병동』에서는 이러한 정도를 넘어선 부분이 많이 보였다. 작품에 몰입이 방해될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제작진들은 그저 돈을 벌 생각 밖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 이미지의 출처는 제작사 SLL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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