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정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고정관념(Stereotype)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1) 잘 변하지 않는 행동을 주로 결정하는 확고한 의식이나 관념,
2)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지나치게 일반화된 생각들이다(표준국어대사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들을 가지고 있을까? 차별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많은 사건들은 고정관념에 의한 것들이 많다. 2020년 5월, 인종차별로 인해 전세계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백인 경찰이 저항하지 않는 흑인 조지 플루이드를 과잉 진압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이 사건은 2012년 시작된 BLM 운동(Black Lives Matter를 슬로건으로 한 흑인민권운동)을 다시금 일으키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인종차별의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처럼 고정관념은 우리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사소하게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미 오랜 과거부터 이어져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뇌는 게으르다.
고정관념을 깨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가 게으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에 대해 인식할 때 그 사람을 범주화시키면 그 사람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덜 들여도 된다. 예를 들어, 공무원 A씨를 만났다. 공무원 A씨를 백지상태에서 두고 이 사람을 파악하려고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뇌 속에 있는 '공무원' 카테고리에서 '공무원의 일반적인 특성'을 추출하면 훨씬 빠르고 쉽게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
왜 굳이 빨리 판단하고 싶어 할까?
이 부분은 진화론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간은 적과 동지를 빨리 구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멀리서 돌을 들고뛰어 오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적이라면 빨리 피해야 할 것이고, 동지라면 우리 편의 무기를 쌓으러 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누군지를 빨리 파악해야 나의 생존에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본능이기에 이처럼 빠르게 상대방을 파악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공무원 A씨가 직업을 바꾸어 공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A라는 사람이 퇴사를 결심함과 동시에 A씨의 성향이 바뀌는가? A씨의 기본적 특성은 변함이 없지만 퇴사 이후 사업가로서의 A씨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뇌에 있는 '사업가' 카테고리에서 '사업가들의 특성'을 추출해낸다.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그를 어떤 집단으로 범주화시켰느냐에 따라 그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이는 곧 우리의 판단이 부정확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에 대한 오래된 경험에 의해 고정관념이 생기기도 하지만 혈액형처럼 근거 없는 집단적 특성을 신봉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혈액형은 B형, 그중에서도 특히 B형 남자다. 혈액형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전파된 속설이며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B형 남자는 나쁜 남자가 되어있다. (영화 'B형 남자 친구'가 이에 한몫한 것도 같다.) 이렇게 어떠한 이유로든 신뢰하기 어려운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생기기도 한다.
고정관념이 일단 생기고 나면 사람들은 거기에 맞는 정보들을 접할 때마다 이를 강화시키게 된다. 자신의 고정관념이 맞다면 굳이 기존 카테고리 속 정보를 수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게으른 뇌에게는 당연한 수순이다. 예를 들면 공무원 A씨에게 고지식한 면을 발견했다. 분명 그렇지 않은 다른 면도 많지만 고지식한 면을 발견한 순간 '이거 봐, 내가 뭐랬어.'라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상기한다. B형 남자가 여사친과 카톡을 주고받았다. A형 남자라면 대수롭지 않았을 것도 B형 남자기 때문에 '이거 봐, B형 남자는 여자가 많잖아.'라고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공무원 A씨가 혁신적 아이디어를 낸 순간과 B형 남자가 남사친과도 카톡을 자주 한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게으르기 때문에 이미 내린 판단에 대해서 이를 새 정보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을 들이기보다는 기존의 정보를 강화시킬 요소들을 찾게 된다.
우리의 뇌가 이렇게 게으르게 타고났다면 방법이 없는 걸까?
우리는 뇌에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의식을 통해 뇌를 지배하기도 한다. 인간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본성에 따라 하루 종일 음식을 배불리 먹고 틈만 나면 드러누워 TV와 함께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터에 나가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귀찮지만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한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뇌가 게으름을 피우며 그동안의 고정관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조금은 귀찮아도 의식적으로 우리에게 고정관념이 있을 수 있음을 늘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먼저 사람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의 고정관념에 반하는 정보도 찾아보는 것이다. 생각보다 내가 생각한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것도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는 수도 없이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미친다. 결코 범주화시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대인관계는 더욱 폭넓고 깊어질 것이다.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집단적 특성(흔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당신은 온전히 부합되는 사람일까? 나를 깊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어딘가에 범주화시켜 이해하고 있다면 참 속상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더 이상 뇌가 자기 마음대로 오류를 범하게 가만히 놔두지 말고 훈련을 시작해보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늘 쉽지 않지만 출근이 지겹고 운동이 귀찮아도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행복한 일상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당장은 익숙하지 않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