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보내준 가상계좌로 등록금을 냈습니다. 드디어 문창과에 입학하는 겁니다.
이제 대학 신입생, 한 단계 더 세분하면 문창과 학생이 된 것이다. 나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작된 방송통신중학교 3년을 지나서 방송통신고등학교 3년, 도합 6년간의 결과물이 65세에 문창과 학생으로 만들어졌다. 뭐 늦깎이라고 칭하기에도 다소 부담스러운, 한참 유행 지난 늦깎이다. 물론 방송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문창과를 목표로 두고 공부하진 않았다.
60을 앞둔 나이에 종합병원 침대에 누워 생각할수록 우울했다.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형벌을 끌어안고 후회하며 생의 종착지를 도착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청소년기에 잃어버린 학교라는 공간이 이순이라는 나이 앞에서 너무 그리웠다. 그래서 시작된 방송중학교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막연하게나마 대학생이 된 모습을 종종 그렸었다.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맞이하는 중등교육의 끝자락에서 어떤 새로운 진로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정규 중 고등학생들이라면 무조건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는 것이 대다수가 꿈꾸는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을 한다고 해도 70이 다 되는 나이에 배출되어서 무슨 취업을 하겠는가. 취업용 진학이 아니기에 선택지가 더 자유스러웠고 그러기에 더 부담스러웠다. 누군가는 황혼을 뻘겋게 물들이고 싶다고 했다지만, 물들이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걸어가는 뒷모습이 누추하지 않도록 흐릿하게 채색됐으면 싶을 뿐이다.
‘어느 학과가 좋을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 이야기가 학우들 사이에서 대화 중에 간간히 나왔다. 도내 대학을 검색해서 적성에 맞을 만한 학과를 찾아봤다.
‘그래 결정했어!’
도내 유일하게 사진학과가 있는 대학을 목표로 삼았다. ‘사진학과?’ 그렇다 사진을 찍는 학과다. 사진학과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이 나이에 취업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선택하는 것도 아닌데 골방에 박혀 버벅거리는 컴퓨터 하고 씨름하거나 출제 예상문제집을 붙잡고 꾸벅꾸벅 졸면서 생을 지탱하고 싶지 않았다. 작품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유유자적 산천경개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60 평생을 밥벌이 때문에 역마살을 속살 깊숙이 감추고 살아온 나에게 사진학과는 운명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학과 같았다.
사진학과는 그냥 가냐!
다행이라면 포트폴리오도 있었다.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표지 사진 공모전에서 연이어 3년간(사진학과 진학을 생각하던 당시에는 2년 연속) 채택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네이버 그라폴리오 공모전에서 ‘데뷔’ 배지를 받은 사진도 있었다.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나머지 사진들을 잘 살리면 훌륭한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라는 야심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3학년이 되자 입시 준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했다. 대학 홈페이지를 다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재검색을 해도 그 학과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작년에 검색해본 그 학교가 분명히 맞는데 사진학과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원하던 사진학과만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도내 유일의 사진학과가 계절 지난 꽃처럼 소리 소문 없이 툭 떨어진 것이다.
학령인구감소로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교가 문 닫을 것이라는데 그 예고편처럼 사진학과가 자기 순번보다도 먼저 사라진 것이다. 사진학과 재학생들의 흔적은 웹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한 순간에 간판을 먼저 내린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짝사랑했던 주 목표가 상실되자 대학에 대한 관심도가 확 줄었다.
3학년 중반쯤 되자 이런저런 대학에서 학교 홍보를 왔다. 돈벌이에 관심이 없고 애당초 능력도 없는 나에게도 추파를 던진다. ‘졸업 시 자격증 취득’ '정년 없는 취업보장' '평생 연금 보장' 운운하면서 입학원서 써내길 강요하는 듯한 대학들에게 슬슬 염증이 생겼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창과를 향한 작은 씨앗은 방송통신중학교 3학년 때 발아했다. 3학년 2학기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자서전 쓰기를 독려하셨다. 각자 본인의 과거사를 한 꼭지씩 의무적으로 써오라는데 처음 쓰는 글이라 참 막연했다.
일찍이 청소년기에 소년 노동자로 사회에 던져져서 노동법의 존재도 모르고 최저임금이라는 용어도 모르고 살았다. 성인들 틈바구니에서 삼시세끼 밥벌이에 급급한 발버둥이었다. 그 이후 성년이 되고 강물에는 유람선이 떠다니는 선진국이 됐지만, 초등학교 졸업자도 안전하게 선진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코리아는 없었다. 지연, 학연, 혈연 등 3 무가 없기에 어긋나는 궤도 속에서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가 내 안에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일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장부정리도 안 해놔서 번번이 금전적인 손해만 보던 놈이었다. 그런 형편없는 글 솜씨로 전쟁을 치르듯 몇 번을 고쳐 쓰다가 두 꼭지를 써 갔다. 선생님께서 ‘정말 잘 썼다’며 칭찬해 주셨다. 자서전 쓰기 국어 숙제는 그렇게 끝났지만 내 안에 잠재되어있다가 튀어나온 글쓰기 욕구는 멈추지 않았다.
하교 후에는 현재 진행형 밥벌이에 매달려야 했다. 밥벌이 시간이 종료되면 미완의 자서전을 써 본답시고 피곤에 젖은 눈꺼풀을 치켜뜨며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둠을 뚫고 원고가 써내려 지면 희열이 느껴지고 눅눅한 과거가 치유되는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늦게 시작한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던 어느 순간, 죽는 날까지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끊기는 몽롱한 순간까지 이번 생의 통과 보고서를 쓰고 싶었다. 흔들리는 보고서의 마지막 글자는 '~다'가 아니라 '그러므로~'가 되겠지.
농업국가의 막내로 태어나서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신흥공업국가를 맨 밑바닥에서 온 몸으로 떠 받치며 살아온 내 인생을 글로 위무하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쓸수록 외로웠다. 누구도 내 글을 읽어주지 않을 것이고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외로웠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제대로 써지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타인 하고 말을 걸고 싶었다. 늘 주변을 떠도는 밥벌이에 얽힌 현실적인 말이 아니라, 조금 비켜난 듯한 소리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내 주변에는 품이 넉넉한 그런 한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창과를 만났다.
미련 투성이 사진학과를 확실하게 버리니 문예창작학과가 다가왔다.
‘어디 갈 꺼요?’
‘문창과에 가기로 작정했어’
‘문창과?’
‘그래 문창꽈!’
‘문창?’
안검하수 핑계로 쌍꺼풀 수술한 학우의 눈이 동그랗게 더 커진다. ‘문창’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학과냐는 거다. 문창은 난생처음 듣는 용어라는 거다. 이런 답답할...."명색이 고3이 '문창'도 모르냐"며 화를 벌컥 내려다가 꾹 눌러 참고 '문예창작학꽈!'를 외쳤다.
'어느 대학인데?'
'아 쒸 당연히 문창과가 있는 대학이지 어느 대학이겠냐!'
이런저런 장학금을 준다지만 외형적인 등록금이 일 년에 무려 700만 원이나 된다. 거기다가 필수적인 경비까지 더하면 천만 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취업도 안 할 건데, 아니하고 싶어도 못할 건데 투자비 회수가 걱정이다. 최소한 본전은 건져야 할 텐데 생물학적 생존기간이 짧다는 사실을 직시하니 슬슬 부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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