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방식으로 과목별로 기말시험이 진행된다. 학기 내내 수시로 진행되던 서열 매기기 식의 평가에 더해서 어떤 과목은 암기 위주 서술식으로, 어떤 과목은 오픈북으로 또 다른 과목은 주제에 대한 리포트 형식으로 진행된다. 여타 학과에 비해서 취업시장과 별 무관한 학과임을 사전 인지하고 입학한 용감한(?) 학생들이다. 따라서 학과가 학과 인지라 전공수업 외에 읽어 봐야 할 책은 세상에 널렸는데 당장 눈앞의 학점 때문에 수험생처럼 쫓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내 갈길 내가 간다"라며 학점에 연연하지 않고 당당하게 e-Book만 보는 학우에게 물어봤다.
"학교 다닐만해요?"
"너무 힘들어요. 고등학교 때 너무 공부만 해서 대학 가면 좀 쉬엄쉬엄 하려 했는데, 뭔 놈의 수업이 고등학교 때 보다도 빡쎄요"
오늘은 시에서 중요한 화자 설정에 대한 기본 강의다.
1, 서정시: 독백, 혹은 고백의 양식
-일반 문학의 원류로 간주되는 서정시에서 시적 발화는 '주체가 스스로 말하는 것', 즉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자기표현(self-expression), 경험의 독백적 표현을 하는 주관적인 장르이다. '엿들여지는 독백'을 말하는 것이다. 일인칭 자기 고백체로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쓴다.
2, 시의 화자와 시 장르의 특성
- 시 장르는 흔히 1인칭 장으로 규정된다. 이는 시가 다른 장르에 비해 주관적, 내면적, 독백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작품 속 화자인 나와 시제 화자인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기 쉽다.
-시인은 작품밖에 위치하고 화자는 작품 안에 위치한다. 이는 시 속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경험적 자아가 시적 자아로 변용된 화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과 작품 속 화자가 다르다는 것은, 결국 시 작품 역시 다른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허구로서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소설도 시도 진실이 아니다, 다만 인간 삶에 진실을 추구한다(허구의 반대는 사실)
3, 시속의 '나'(화자)와 시 밖의 '나'(시인)
-시속의 '나'는 시인이 자기 주관의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는 일상적 자아가 아니다. 화자란 시속에서 '시' 밖에 존재하는 시인을 대리하여 노래 부르는 허구적 대리인이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시인이 선택한 어떤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는 유형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4, 사적 진술과 공적 진술
-습작기의 많은 작품들은 흔희 시 작품 속에 일상적인 자아를 그대로 투영한다. 이처럼 유형화, 개별화되지 않은 일상적 자아로 인해 작품이 개인적 차원의 넋두리에 그치거나 초점이 혼란스러워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개인적 차원의 사적 진술을 시 장르라는 공적 진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면 시 밖의 '나'와 다른 '시'속의 '나'를 창조하여야 한다. 실제의 나와 다른 작품 속 나를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인 만큼, 실제 현실 속의 나와 달리, 작품 속에 구현되는 구체적 경험의 진술과 어울리는, 유형화된 '나'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진달래 꽃'의 화자인 '나'는 시인 '소월'의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 속의 연애는 실제 연애와 다를 수 있다. 문학작품 속 연애는 내 연애가 아니다. 작가의 연애도 아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연애다. 작가 자신의 현실 속 연애는 지리멸렬할 수도 있고 환멸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극 속의 연애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5, 시의 화자: 양식화된 가면(역할 수행) 시 속의 나는 역할을 한다.
-시의 화자 또는 시적 화자란 시 작품 속에서 실제 시인과 구별되는 화자를 말한다. 이때 화자는 시인의 경험적 자아가 변용, 창조된 것이지 시인의 실체나 개성 그 자체가 아니다.
-주관적이거나 독백적인 성격이 강한 습작기의 폐단을 벗어나려면 실제의 자아를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화된 가면을 쓴 화자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습작 시절엔 경험한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가면 쓴 화자를 만들 필요가 있다. 배우 송강호 마동석은 영화 속 인물을 구현한 연기자이지 실체는 연기라는 가면을 쓴 것이다. 송강호는 기생충에서 찌질한 가장을,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에서 발버둥 치는 인물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는 허구로서의 시의 예술성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며, 사적인 진술을 공적인 진술로 승화시키는 장치이기도 한다.
6, 퍼소나(배우 가면)
시의 화자를 퍼소나(persona)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 퍼 소난도(personando)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했다.
-즉 퍼소나는 고대 희랍의 연극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지칭했었다.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배우가 맡은 역할을 통한 이미지 구축까지 말한다. 심지어 개성과 자아를 뜻하는 말로까지 확대된다.
-이 양식화된 가면(stylized mask)은 외부 세계에 대한 개인의 심리 태도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이를 통해 시작품 속에서 화자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아의 세계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7, 가면의 진실
-문학은 허구인가? 그렇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예술적 속성을 지닌다. 묻는다. 문학의 장르인 소설은 허구인가? 당연히 허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허구인가? 많은 학생들이 망설인다. 시는 허구인가 아닌가 혼란스러워한다. 심지어 시는 진실이라는 대답도 나온다. 시가 주관적인 독백의 장르라는 인식하에 자전적으로 보지만 시의 제재에 충실하게 창조된 개성으로서 허구로 본다.
-시는 독백의 양식이다. 독백이란 연극에서 한 인물이 혼자 말하는 극대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른 배우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사라는 점에서 방백과 유사하지만 독백은 특히 관객마저도 청자로 상정하지 않고 단지 혼자 중얼거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독백이란 관연 가능한가. 독백 조차도 누군가 듣는, 혹은 들어야 하는 대사 아닌가. 이런 점에서 독백이란 엿들어달라는 소리다 혼자 인척 중얼거릴 테니 부디 엿들어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다. 독자를 상정하지 않는 일기조차도 덧붙이고 치장하고 변형한다.
시는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오히려 허구에서 벗어난다. 소설이나 시는 허구를 전제로 인정하니까 작가는 그 공간을 이용하여 솔직한 자기 고백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이 가진 허구로서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