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애칭 변천사
20대 초반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와 나의 호칭이 만들어졌는데 남편은 바보 온달,
나는 평강공주라고 서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연애할 땐 모든 걸 저에게 맞추어주는 남편이 엄청 마음
편하게 생각되었고, 동화 속 평강공주처럼 이 남자를 잘 내조하면 뭔가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20대 초반 나이를 감안해 볼 때 뭐든 할 수 있다는 저의 자신감이 바로 평강공주 신드롬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남편의 의도를 알지 못했고, 남편도 제가 볼 때는 어리바리하여 깊은 속내를 숨기고
그런 애칭을 붙였다고는생각하지 않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 담도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셔서 3년 연애 중이던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이 토요일이었지만 저는 결혼식 전날인 금요일까지 유치원에서 근무해야
해야 했고, 그 흔한 마사지도 한번 받지 못하고 결혼식장에 들어가게 되었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여동생 세 명 중 누구라도 빨리 보내고 싶었던 오빠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결혼
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면서 남편의 호칭은 느티나무가 되었습니다.
1997년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이듬해 봄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줘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실직자가 되었지요.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 남편은 동료들 눈치를
보다가 실업수당도 탈 수 없는 자발적 퇴사를 하고 나와서 말 그대로 갑자기 백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가구 회사 개발실에서 디자인을 하던 남편은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새벽에 우유배달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갓 서른이 되었고, 남편도 30대 초반이라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였지만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평생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한 것이었어요.
그때 저의 핸드폰에 저장된 남편의 이름이 느티나무입니다.
아 이 남자는 어떻게든 가정은 책임질 수 있겠구나! 더운 날 나에게 그늘을 만들어줄 느티나무 같은 남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그때부터 남편의 저장 이름은 느티나무로 쭈욱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40대 중반 제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남편의 이름은 가족 1호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회사에서 잘 지내려면 회식문화에 열심히 참여해야 했던 시절이라 남편은 치열하게 살았지만 30대 초반 학습지 회사에 취업해서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던 저에게 남편은 정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옆집 아저씨같이 느껴졌습니다. 부부 사이에 대화도 줄어들고, 술에 절인 얼굴로 출근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보다는 밉고, 짜증만 나게 느껴졌던 시간으로 기억이 됩니다.
며칠 전 우연히 남편이 모임에서 친구 와이프에게 전화가 오는데 이름 000 세 글자만 저장되어 있는 걸 보고 갑자기 내 마누라에게 나는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하다며 물어왔습니다.
"가족 1호잖아. 당신 10년 동안 쭈~욱 가족 1호였어."라고 말해주었더니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아들은 나의 꿈" "딸은 나의 희망"으로 저장되어 있으면서 "남편은 가족 1호" 라니 서운하답니다.
그동안 닉네임에 대해서는 별생각 없이 살아온지라 나이 들어 불평하는 남편이 쪼잔하게 느껴집니다.
회사 다닐 때 동료였던 분은 남편이 정말 꼴 비기 싫어서 "알 수 없음"으로 저장되어 우리를 웃게 해주던 기억이 납니다. 알 수 없음으로 저장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하셔~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 새로운 닉네임 하나를 바꾸어 저장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닉네임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겨울끝자락이더니 3월 드디어 봄이 오나 봅니다.
날씨에서 포근함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