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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pr 06. 2018

아날로그_몸에 새겨진 기억

레코드판의 느릿한 추억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레코드 판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영국의 락그룹 스모키(Smokie)의 대표곡 중에 하나인 Living next door to Alice(1967)의 애절한 구절이 흐른다. 


Sally called, when she got the word (샐리가 소식을 듣고 전화했어요)
She said "I suppose you've heard about Alice" (“당신도 앨리스 얘기 들었죠?” 이렇게 말하더군요)
Well, I rushed to the window, and I looked outside (창문으로 달려가서 밖을 내다봤어요)
And I could hardly believe my eyes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죠)
This big limousine pulled slowly into Alice's drive (
커다란 리무진이 앨리스네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룹의 리드 보컬 크리스 노먼의 걸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딱 어울리는 노래다. 판이 돌아가면서 찌직거리는 소리도 난다. 레코드판 특유의 긁히는 소리인데, 잘 관리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 소음이 섞여 든다. 허스키 보이스에 슬쩍 끼어든 찌직거림은 귀에 거슬리는 게 아니라 정겹다. 사실 이 맛에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게 아닌가.


예전에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좀 아는 듯이 폼 잡고 앉아 있을 때의 생각도 나고, 한참 레코드판에 관심을 가졌던 시절, 부산 국제시장 레코드 가게에서 불법 복제된 레코드판(백판이라고 불렀음)을 사러 다니던 추억도 떠 오른다. 옆집에 살던 앨리스는 나의 사랑 고백도 받지 못하고 속절없이 떠나갔지만, 음악에 실린 옛 추억은 빙글빙글 느린 속도로 다가온다.


1980년대 말에는 소니나 파나소닉 워크맨 하나 가지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시절이었다. 한 손에 워크맨을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모습은 멋짐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CD 플레이어가 나오면서 용량이나 음질 면에서 워크맨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즈음에 턴테이블을 갖춘 커다란 전축도, 레코드판도, 담배연기 자욱한 음악다방도 사라져 갔다. 아이폰 등 모바일 기기가 나오고서는 CD도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초반 직원수만 60명이 넘었던 서라벌 레코드사는 하루에 10대의 프레스로 6,000장의 LP(Long Playing)를 찍어냈다. 그러던 것이 97년에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된다. 세상의 변화와 디지털의 공세를 이겨낼 수 없었다.  

<Smokie의 오리지널과 부사국제시장에서 구입한 일명 빽판>

그런데 최근에 레코드판이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레코드판을 찍어내는 회사도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젠 인터넷 서점이나 전문 쇼핑몰에서도 원하는 레코드판을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1980년대 CD, 1990년대 MP3의 등장으로 사멸 위기에 내몰렸던 LP의 회복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국내 음반사인 씨앤엘뮤직과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는 최근 LP 음반 5종을 함께 내놓았다. 카라얀의 마지막 음반인 브루크너 교향곡 7번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소품집,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의 그리스 민요 모음 등 1980년대의 LP 명연(名演)들이다. 단종된 희귀 음반들만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대에 거래되던 중고 LP 시장에서는 '단비' 같은 소식이다. 정경화의 소품집은 보름 만에 500장이 모두 팔렸다.'

유행이 돌고 돈다는데 이것 역시 그런가? LP의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   


종이책은 오감을 자극한다  

아이디어가 떠 오를 때 바로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아이패드를 구입했다. 책을 읽으면서 관련된 기사나 동영상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들고 다니면서 아무 곳에서나 글을 쉽게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도했던 글을 쓰는 데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저런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많이 뺏기고 있다. 별로 재미도 없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한참이나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으면서도 무음으로 야구 중계도 켜 놓고는 응원하는 팀의 스코어를 계속 확인한다. 광고 메일도 일일이 다 보고 지우는 착한 고객이 된다. 고맙다는 듯이 광고 메일이 더 많이 온다. 아이패드를 갖게 된 이후의 현상들이다. 그 때문에 글을 쓰기는커녕 책 읽는 시간마저 줄어 버렸다.


차라리 전자책을 사서 책을 읽는 게 낫겠다 싶어 전자책을 다운로드했다. 아이패드에 거의 무제한으로 담을 수 있고, 언제든 읽고 싶은 책, 찾아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어 좋다. 출장을 갈 때도 무거운 책을 가져가지 않아도 되고, 표시해 둔 부분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종이책에 비해 가격도 착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점이 내 몸에 착 감기지는 않는다. 인터넷 기사는 잘 읽히는데, 전자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읽은 내용이 머리 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 종이책을 읽는다고 해서 다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전자책의 내용은 종이책보다 휘발성이 강하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여기저기 밑줄도 긋고, 라벨도 붙이고, 메모도 하는 등 눈뿐만 아니라 손의 노동도 함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책을 주문하고 내 집으로 배송되기까지의 기다림이다. 책을 포장한 종이박스의 묵직한 무게감도 좋고, 포장지를 열어 어떤 책들이 내 집으로 왔는지 살펴보는 그 순간의 설렘도 좋다. 어떤 책은 너무 두꺼워 지레 먹기도 하고, 어떤 책은 깜찍하고 예쁘다. 책을 손에 쥐고 촤르르르 낱장들을 빠르게 넘길 때의 느낌은 종이책만이 주는 즐거움이다. 표지의 매끄러운 감촉과 옅은 기름 냄새는 또 어떤가? 다 읽은 책, 읽다가 잠시 접어둔 책, 내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서재의 책장에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리를 가는 걸 직접 눈으로 매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종이책이 주는 매력이다. 종이책은 오감을 자극한다.

< 종이책이 주는 즐거움>


전통시장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최근에 서재 의자를 좀 더 편안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여러 쇼핑몰을 돌아보고 가격비교도 해 보고, 상품평도 꼼꼼히 챙겨 읽고 최선의 결정을 했는데, 결국 반품했다. 반송하는데 드는 택배비 몇 만 원에 속이 쓰리긴 했지만, 막상 실물을 받아 보니 오랫동안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면 시간 절약, 가격 비교 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반품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특히 의류를 구입해서 입어보면 사진이나 방송으로 보던 것과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색상이나 질감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도 하고, 입었을 때 불편하기도 하다. 화면으로만 보고 결정하는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런 이유로 백화점 등 대형 오프라인 쇼핑몰과 전통시장이 여전히 건재한 걸까? 이런 곳에 가면 만져 보고, 입어 보고, 맛보며 오감을 통해 제품을 선택할 수 있다. 대신 이곳저곳을 한참 걸어 다녀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다.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는 아내를 따라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들의 이유이기도 하고. 


얼마 전, 수원화성 구경을 갔다가 근처의 수원영동시장, 지동시장, 미나리광시장 등 여러 전통시장들이 몰려 있는 곳을 둘러봤다. 시장은 길거리 상인들, 맛집에 줄 선 사람들, 점심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시장 골목을 누비며 쇼핑에 여념 없는 사람들, 볕 좋은 곳에 앉아 겨울의 느릿한 하루를 즐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아직 봄이 완연히 오기 전인데도 그곳은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빵 굽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 끓는 기름 냄새,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소리. 시장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과 코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수원 영동시장>


아날로그도 괜찮아

스마트폰에서 언제든지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레코드판, 턴테이블과 엠프, 스피커까지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음질의 차이도 나는데도 말이다. 그건 아마도 자기 선택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스트리밍 서비스는 나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그저 들려주는 것은 듣는 것이고, 간단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의한 쉬운 선택일 뿐이지 않은가.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몸의 수고로움을 거쳐 스스로 선택해서 듣는다는 느낌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을 완전히 자기가 소유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뉴스를, 모든 책을 손바닥 위에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종이신문과 종이책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터넷 뉴스와 전자책이 나올 때만 해도 종이는 곧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우리 곁에 있다. 2017년 CNN은 전자책 판매는 감소하고 종이책 판매는 증가했다는 다소 의아스러운 내용을 보도했다. 영국출판인협회에 의하면, 지난해(2016년) 영국의 전자책 판매는 17% 감소, 종이책은 7% 증가했고, 전미출판협회 집계에서도 미국의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 도서 판매에서 전자책 매출은 18.7% 감소, 종이책은 7.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7.5.1. 한겨레신문 인용)


어쩌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는 종이책이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종이 특유의 그 느낌을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삐뚤삐뚤 그어진 밑줄과 여기저기 여백에 남겨진 메모들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고, 습기 담은 오래된 책의 냄새와 누런 손 때도 누군가는 좋아할 테니까.


시장에는 우리가 구입하거나 소비하고자 하는 물건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고, 서로가 느끼는 정(情)이 있다. 사람들 간의 부대낌으로 인해 소리와 냄새와 촉감이 생겨난다. 오감을 통한 육체적인 즐거움이 시장에는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곳에 간다. 파코 언더힐이 『쇼핑의 과학(세종서적, 2011)』에서 우리는 상상력과 개념화 능력,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결국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게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육체적 존재라고 설파한 이유다.

날씨가 더워지면 커피 로스팅하는 게 고역이다. 로스팅 기계에서 나오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로스터기에 집진장치가 붙어 있는데도 매캐한 연기에 눈도 따갑다. 1주일 한 번, 두어 시간 정도 걸리는 작업이다. 봉지에서 생두를 꺼내어 채에서 한 번 털어내고, 벌레 먹거나 온전하지 못한 콩들을 들어낸다. 커피 맛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로스팅 과정이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원하는 맛을 얻을려면, 양과 온도, 시간을 잘 맞추고 색깔의 변화에 신경쓰야 하기 때문이다. 

<로스팅 후, 에티오피아 세렝게티와 예가체프>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일도 번거로운 육체적 과정이다. 물이 끓는 동안 거름종이와 드립퍼, 서버를 준비한다. 87도로 끓인 물을 거름종이에 한 번 부어 종이의 잡티를 제거한다. 커피를 전동밀로 알맞게 갈아내고, 커피가루를 거름종이에 붓고 2~3분 이내로 드립 한다. 미리 준비 해 둔 작은 커피잔에 따라내면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진한 커피 향이 온몸을 감싸고 돈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몸의 수고로움의 결과다. 대신에 오감이 함께하는 과정이라 즐겁다. 매캐한 연기, 볶은 커피의 진한 향, 입 안 가득 퍼지는 과일 맛, 고구마 맛, 초콜릿 맛...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마시며,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Smokie의 노래를 들으면 째깍째깍 아날로그적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아날로그는 번거롭고 수고롭지만 몸과 함께 움직이는 재즈 같은 리듬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이 거의 완성된 바로 이 시점에 디지털 너머에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심인 데이비드 색스는『아날로그의 반격(어크로스 2017)』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준 이점들(속도, 고속 인터넷 연결, 강력한 프로세싱 파워)은 아날로그의 장점들(고요하고 개인적인 관계, 깊은 사색)을 희생시켰다'라고 주장하며 아날로그가 영원히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라 주장한다.

 

지금은, 사람의 손길 대신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을 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디지털의 세상이다. 디지털의 장점을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소소하고 고요하며 사색적인 아날로그적인 삶 또한 구닥다리로 여길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를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가진 투박한 아날로그도 나름 괜찮았다고 무척이나 그리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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