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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pr 24. 2018

단단한 중년: 뿌리를 깊게 내린 단단한 나무처럼

1장 중년,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중입니다

길고 깊은 마음의 상처

2018년은 새해의 희망적인 소식보다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들로 시작했다. 현직 검사로부터 시작된 '#Me Too'운동이 연극, 문학, 방송, 정치 등 사회 전반으로 번졌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전도유망한 정치인도 검찰의 조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미투 운동의 불씨가 사그라지기 전에 '갑질' 논란이 다시 뉴스에 불을 지폈다. 대한항공의 조양호회장의 자녀, 조 전무가 사건의 장본인이다. 그녀는 4월 16일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광고 관련 회의에서 광고대행업체 직원이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면서 물컵에 담긴 물을 얼굴에 뿌리고, 유리컵을 집어던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경찰이 내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 직후, <오마이뉴스>에서 음성파일을 하나 공개했다. 누군가가 직원에게 사무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는 내용이다.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악을 쓰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녹음되어 있었다. 그 상황속에 있던, 그 어마무시한 괴물의 소리를 직접 들어야 했던 그 사람 입장이 잠시 되어 본다. 끔찍하다.


미투 운동이나 갑질 논란을 일으킨, 즉 가해자들이 워낙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라 뉴스는 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얌전해 보이더니 그렇지 않네.'. 그러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잘못에 대해 법의 엄격한 적용과 처벌을 해야한다고 열을 올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더 걱정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오히려 피해자 쪽이다. 그들의 실명을 밝혀내고, 피해자도 어느 정도 여지를 주지 않았나 하는 식의 가십성 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겪었을 그 길고 깊은 고통의 시간에 대한 아픔에 대해서 말이다. 성폭력, 성희롱의 피해는 물론이고 갑질 피해는 신체적인 것도 심각하지만, 심리적인 상처와 고통이 더 크다. 몸에 난 상처는 치료를 한다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쉽게 치료되지도 회복되지도 않는다. 가해자가 사과를 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작아질까?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그 상처가 아물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것이 잊혀질까?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는데.


자존감이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박홍균은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 2016)』에서, 자존감을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즉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가 또는 낮게 평가하는가에 대한 레벨이라고 정의한다. 자존감은 자기 효능감, 자기 조절감, 자기 안정감 등 3가지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자기 효능감은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이다. 가정, 직장, 모임 등에서 역할이 있고, 쓰임이 있다고 느끼면 효능감이 높은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효능감이 낮은 것이다. 직장 상사로부터 업무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자기 효능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연극인으로, 시인으로 또는 비서로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단지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을 받는다면 자신이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 앞에서 물벼락을 맞는 경우라면 또 어떤가?


자기 조절감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본능을 말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조절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거나 주도적으로 해 나가지 못하는 경우는 자기 조절감이 낮은 상태다. 특이한 경우이긴 하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던 집을 팔아서 세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과 내용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 조절감이 최상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안전감은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능력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던, 어떤 위치에 있던 스스로 만족하고 안정감을 갖는 능력이다. 미투 운동이나 갑질의 피해자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겨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집 바깥출입을 어려워하고,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두려워한다. 어디에서든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안전감이 낮아 자존감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존감은 자신이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지,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지 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자존감을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생각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고,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서툰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며, 먼저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충고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처럼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직무를 잊어버리기도 하는 사람도 종종 있기는 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은 열렬히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스스로 자존감을 지켜야 하는 시대

누구나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냐고 물으면, 한결같은 대답이 행복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튼튼한 자존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윤홍균은 '바야흐로 셀프로 자존감을 지켜야 하는 시대다. 행복해지기 위한 온갖 방법과 글귀가 나무하지만 진짜 행복은 튼튼한 자존감에서 나온다. 건강한 자존감이야 말로 요즘처럼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다.'라며, 행복한 삶을 위해 튼튼한 자존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모두들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각자의 삶에 바쁜 현대인들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심리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잠시 틈이 나면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댓글을 읽거나 달고, 다른 곳으로 퍼 나른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정작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위 사람들에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 느슨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관계는 맺기도 쉽지만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다. 페이스북, 카톡친구, 밴드, 동아리 등 현대인들이 맺는 관계는 전통사회의 끈끈함과는 거리가 멀다. 밴드에서는 아무런 인사도, 이유도, 설명도 없이 탈퇴가 가능하고 심지어 강퇴를 당하기도 한다.  자리의 대체 가능성이 커져서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하다. 가볍고 쉬운 관계성은 사람의 자존감도 가볍고 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고 신영복 선생은『담론(돌베개, 2015)』에서 인간의 존재를 '관계'라는 프레임으로 들여다 봤다. 존재란 개별자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개별자간의 관계로 인식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느슨하고 허약한 현대인의 관계망에서 자존감의 상실은 쉽고, 지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처럼, 닻을 단단히 내린 배처럼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자존감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줄 수 없기는 하지만 스스로 만들고 높이 세워 나갈 수 있다. 자존감에 상처가 나고 무너지는 원인의 대부분이 외부의 요인이긴 해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선, 스스로를 되돌아 보자. 스스로 돌아보기를 해야 건강해진다. 그 동안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살펴보자. 되돌아 보면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좀 더 노력했으면 싶기도 하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살아온 여정의 중간 중간에 또렷이 남아 있기도 할테다. 그래도 자신을 도닥여주자. 지금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잘 했구나, 힘들었구나, 잘 견뎌왔구나, 꽤 괜찮았어라며 스스로를 격려하자.


그리고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찾자.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세상를 구하는 원대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인생의 절반을 살아오는 동안 내게 따뜻한 손길을 준 사람, 내가 도움을 준 사람, 나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의 또렷한 또는 희미한 관계들은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말해 준다.


나의 시간과 열정을 쏟을 그 무엇을 찾자. 그 무엇이 사람이어도 좋고, 물건이어도 괜찮고, 일이어도 좋다. 아직도 사랑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나.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주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더 사랑하자. 그렇게 내 주변의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랑하자. 겨울 너머 창문으로 찾아드는 봄볕도, 긴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의 작은 초록잎도, 머리칼을 쓸고 넘어가는 바람도 사랑해 보자.

나를 다시 세우는 노력들이 자존감을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에 쉽게 춤추지도 않고, 비난에 쉽게 상처 받지 않는다.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처럼, 닻을 단단히 내린 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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