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랑 없는 세상

1장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

by 배정철

클림트의 다나에, 제우스의 다나에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화가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입니다. 그의 작품은 그 화려함으로 인해 광고에도 자주 이용됩니다. 특히 ‘유디트’, ‘키스’, ‘다나에’ 등이 많이 알려졌는데, 작가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작품은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다나에’라는 작품은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웅크리고 있는 여자의 다리 사이로 황금색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리는 그림입니다. 그림이 다소 야하게 느껴지는데, 그림의 내용을 알고 보면 야하기보다는 황당한 느낌이 듭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제우스와 다나에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은 아닌 듯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인 다나에는 아르고스의 왕 이크라시우스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 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장차 자신, 즉 외할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듣게 됩니다. 신탁을 듣고 자신의 미래가 걱정된 이크라시우스는 자신의 딸을 청동으로 만든 탑에 가두어 버립니다. 다나에가 결혼할 남자를 만나지도, 그래서 결혼을 하지도 못하게 해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가 살자고 딸을 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청동 탑에 갇힌 다나에를 발견한 제우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고 맙니다. 육욕에 눈이 먼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탑의 철창 사이로 스르르 들어가서 기어코 다나에와 관계를 가집니다. 그림에서 다나에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황금비가 바로 제우스가 변신한 모습입니다. 듣고 보니 황당하죠?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그린 것이 클림트의 ‘다나에’입니다. 그림의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기는 해도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는 아름다운 그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신들의 사랑

제우스는 ‘다나에’ 말고도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립니다. 제우스에게는 헤라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엄연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우스는 스파르타 왕비인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하여 사랑을 나눕니다. 레다는 트로이 전쟁의 단초가 된 헬레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낳습니다. 검은 구름으로 변신하여 강의 신의 딸인 ‘이오’와 사랑을 나누고서는 나중에 이집트 왕이 되는 에파포스를 낳습니다. 에우로페를 유혹하기 위해서 잘생긴 황소로 변신합니다. 그 사랑의 결실로 크레타의 시조인 미노스가 태어납니다. 테베의 왕 카드모스의 딸인 세멜레 역시 제우스의 아이를 가집니다. 이를 시기한 헤라는 세멜레를 꼬드겨 인간이 볼 수 없는 제우스의 원래 모습을 기어이 보게 하고는 그 빛에 타 죽게 합니다. 세멜레의 배 속에 있던 아이는 제우스의 허벅지로 옮겨져 자라게 되는데 이 아이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바쿠스)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제우스의 육욕적이고 원초적인 사랑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있고, 제우스에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미소년 아도니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와 그를 기다리며 정절을 지킨 페넬로페의 사랑은 후대의 그리스인들에게 두고두고 칭송을 받습니다.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게 된 오이디푸스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그리스 로마 신화는 재미있기는 한데 등장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하면 너무나 많고 헷갈려서 지레 질려 버리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의 경험입니다).


지옥에 빠진 동일자의 사랑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렇게 사랑 이야기가 많은 건 우리 인간이 그토록 사랑을 갈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화도 결국에는 사람의 이야기이니까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든, 친구와의 우정이든 말이죠. 그런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이 종말을 맞았다고 선언합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종말에 이른 이유는 오늘날의 세계가 규격화되고 자본화된 동일성의 지옥이기 때문이다.”라고. ‘동일성의 지옥’, 사람들이 서로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생김새도 닮고,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심지어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말입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말의 역설이 떠오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디서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분명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같은 사람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 같기도 합니다. 음악 프로그램이나 콘서트에 등장하는 아이돌 그룹은 남성그룹이든 여성그룹이든 멤버 개개인을 구분하는 건 저와 같은 중년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옷차림을 비슷하게 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얼굴의 생김새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현상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집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더 그렇기는 하지만 딱히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좀 든 중년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톡스나 성형 수술 등 의술의 도움을 받은 부분도 있고, 날씬한 몸매를 위한 다이어트의 광풍, 최신 유행을 좇아가는 사람들의 심리 등 그 이유가 다양합니다.

정보통신의 발달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최신 유행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게 합니다. 정보의 빠른 공유는 대중의 몰개성화를 부추깁니다. 남과 다름에 대한 우려와 거부감이 자연스럽게 비슷비슷한 얼굴과 옷차림을 만들게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확인하고 모방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겉모습도, 생각도 서로를 닮아갑니다. 제각각 다르게 태어난 우리는 살아가면서 같아지려고 애씁니다. ‘동일자의 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있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타자를 찾아 나섭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 밴드, 인스타그램 등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 놓고 ‘좋아요’에 스스로 목줄을 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타자를 찾아 나서는 행동들이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타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과 닮아간다는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죠.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요.

몸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나의 분신은 늘 그곳에 있다, 너와 함께 있다고 외칩니다. 나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형국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자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타자를 닮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서버립니다. 혼자가 되는 것,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자기 확인은 자기에게만 머물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본화된 사랑

닮은 것뿐만 아니라, 자본화되었다고도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경제적 가치로 판단합니다. 사랑에 대한 생각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두 개인이 만나 서로 단순히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사람이 가진 내면을 주고받는 경험이어야 하는데 현대 사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현대 사회의 나르시시스트적인 개인주의와 모든 것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해 버리는 자본주의적 태도가 다른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방해합니다. 성과중심의 사회, 성공에 대한 맹목적인 긍정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에로스가 종말을 고했다 말합니다.

신영복의 『강의(돌베개, 2004)』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근사한 로펌 변호사와 평범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그의 아내에 대해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렇게 근사한 변호사와 저 여자가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여자 집에 돈이 많았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결혼했을 리가 없어.”

로펌 변호사와 그의 아내가 겉보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이 어울리는 한 쌍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 쪽에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결혼한 이유가 성립된다고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내밀한 사랑과 애정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근본적인 경험과 관계를 그저 경제적 등가 가치로만 생각합니다. 자본화된 동일성만을 인식의 기준으로 세웁니다.

규격화되고 자본화된 동일성을 무의식적으로 쫓아가는 현대인은 사랑할 대상, 즉 타자를 좀처럼 찾지 못합니다. 타자의 소멸로 인해 자기 확신에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자기 확신에 충만한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공간을 스스로 만들지 못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의 공간을 갖지 못한 자아는 긍정에 의한 자기 착취, 즉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주문을 걸면서 끊임없이 성과를 쏟아내는 데 자신을 소진해 버립니다. 한병철이 다른 책에서 말한 ‘힐링은 곧 킬링이다’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자아를 위한 힐링이 아니라, 새로운 성과를 위한 힐링, 소진을 위한 힐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에로스의 종말, 사랑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80여 년 전에 그린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더 짙은 회색빛으로 다가옵니다. 인공 배양으로 태어난 그들처럼, 지금의 우리들이 애써 서로를 닮아 가기 위해 정신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이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1. 꽃이 오는 건 설렘이 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