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
세종시에는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북쪽과 세종시청이 있는 남쪽 사이로 금강이 흐릅니다. 수량도 많고 주위에 원래 있었던 수풀과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어 풍광이 참 아름답습니다. 강변을 따라 자전거 도로와 산책길도 잘 정비되어 있어 아침저녁으로 찾는 사람이 많더군요. 자전거 도로는 대청댐에서 시작하여 서해안 금강하굿둑까지 이어집니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146km입니다. 자전거 마니아들은 한 번쯤 도전해 보는 코스라고 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밤에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 무리 지어 라이트를 반짝이며 한밤에 라이딩을 즐기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저도 전기자전거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충전 배터리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해 보면 그 절반쯤은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밤이 아니라 주말에 용기를 내어 봐야겠습니다.
개망초의 억울함과 눈치 없는 달맞이꽃
그 강가 주변 낮은 언덕에 더운 바람이 찾아오면 노랗고 하얀 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집니다. 어느 날 아침 산책하러 나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는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잎이며 꽃 수술이며 온통 노란색 꽃은 (대)금계국이고 하얀 잎에 노란 수술을 가진 작은 꽃은 개망초라고 합니다. 둘 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어디서나 잘 자란다고 합니다. 곽재구 시인은 『길귀신의 노래(열림원, 2013)』에서 새만금 간척지 주변에 피어 있는 미국미역취에서 고단한 이민자의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요. 금계국과 개망초도 그들의 고향인 북아메리카에서 이곳까지 와서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 이면에 억센 힘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강가 낮은 언덕에 금계국과 개망초가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보면 자기들끼리 보듬고 다독이는 서로 간의 정도 많은가 봅니다. 개망초는 우리네 논가에도 마구 피고 자라 농사를 망친다고 해서 옛사람들에게는 예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 버팀목에 묻어 들어왔다는 설이 있는데, 꽃이 우리나라의 들에 번져 나갈 즈음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잃었던 터라 망초(亡草)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자기 이름이 그런 의미로 붙여지고 불린다는 걸 알면 아마도 개명 신청이라도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으로 온 것도 제 뜻이 아닐 터인데 이름마저 망초라니, 그 억울한 심정을 누가 알아주나 싶어 마음이 짠해집니다.
오랜만에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러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전례 없이 무덥고 긴 여름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꽃들도 뜨거운 태양 빛에 다 타버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더군요. 하긴 사람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견뎌 내기 어려웠는데 햇볕 한 줌 가릴 데 없는 강변에서야 오죽했을까요.
그렇게 더위를 견딘 녀석들 중 가을바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시든 잎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꽃들이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꽃들도 사람 사는 세상 모양으로 눈치 없는 녀석들이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아니, 눈치 없는 녀석이 아니라 제 온몸 꼿꼿이 견디어 낸 억센 녀석일지도 모르겠네요. 가로등 밑에는 노란 달맞이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고, 어쩌다 쑥부쟁이도 보입니다. 이 달맞이꽃은 가로등이 달인 줄 알고 거기에 자리를 잡고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싶더군요. 제 딴에는 매일매일 달을 볼 수 있어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가로등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녀석들은 그걸 보고 웃었겠지요.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구별 못 하는 무식한 놈
요즘에 꽃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늙으셨나 보네요.” 늙었다는 소리가 반갑게 들리지는 않지만, 꽃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들꽃의 생김새는 비슷비슷한데도 이름은 제각각입니다. 책을 보고 사진을 찾아보아도 헷갈리기 일쑤입니다. 그나마 포털 사이트에 ‘꽃 검색’이 따로 있어 카메라로 꽃을 비춰 보면 가능성이 높은 꽃 이름을 알려 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모야모’라는 앱에서는 꽃과 식물 이름이 궁금할 때 사진을 찍어 올리면 여러 사람들이 친절하게 이름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들꽃 이름을 헷갈려하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저와 같이 꽃을 보고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살짝 위안이 됩니다. 하긴 들꽃 이름 좀 모르고 산다고 어떻겠습니까. 그냥 예쁘구나 하고 즐기면 그뿐인데요. 그런데 안도현 시인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구별 못 하는 나를 무식한 놈이라고 합니다. 꽃 이름 좀 모른다고 무식한 놈이라니….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이라는 시입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도니스
들꽃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절교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산책길에, 등산길에 저마다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요. 게다가 그 꽃에 담겨 있는 사연 한 토막이라도 알면 그 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꽃이 가진 화사한 얼굴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마음이 슬쩍 전해져 올 테니까요. 아네모네가 그렇고 수선화가 그렇습니다.
아네모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아도니스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아도니스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청년입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또 다른 여인 페르세포네의 사주를 받은 아레스가 멧돼지로 변하여 사냥을 나온 아도니스를 죽이고 맙니다. 그런 아도니스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그의 피에 넥타르를 뿌려 꽃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합니다. 아네모네의 강렬한 색들은 미소년 아도니스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신의 질투인가 봅니다.
수선화에도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죽음입니다. 자신을 모르고 살아야 명대로 살 수 있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죠.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나르키소스가 수선화로 재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진종구의 『들꽃에 그리스 신화를 담아』라는 책은 들꽃에 담겨 있는 이런 신화를 하나 둘 들려줍니다. 오직 토종 수꽃에만 발아를 허락하는 토종 민들레에서는 트로이 전쟁에 나간 남편 오디세우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의 절개를, 추석 즈음 선암사 온 천지를 빨갛게 물들이는 꽃무릇에서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고마움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가을 들녘에는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꽃들이 제각각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과 그들이 간직한 내밀한 사연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소곤거리고 있을 테지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선암사, 불갑사로 꽃무릇 구경을 가볼까 합니다. 제우스에 대항한 프로메테우스의 용기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 붉디붉은 꽃을 보며 가슴으로 전해 오는 감동을 느끼면 그뿐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꽃을 사랑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즐겨 볼까 합니다. 사실, 꽃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세월이 아니라 설렘이 들어오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