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18일 차
#Ledigos~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29.23km / 8시간 20분
#숙소 : La Morena(40유로, 2인실, 싱글 2개)
-와이파이가 잘 안 되는 것이 유일한 흠
충만한 아침
8월 11일, 목요일, 05:52, 18일 차다. 어제 계획보다 3km 전에서 쉬었기 때문에 오늘은 좀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기온 18도, 새벽에 비가 제법 내려서인지 기온은 높은데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하다. 동네 어디에서 잔치를 하는지 밤새 떠드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서 들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중고등생쯤 되는 아이들 여럿이 마음 회관 같은 곳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이 시간까지 놀고 있다. 새벽에 길을 나서면서 가끔 약간 술 취한 청소년들을 보게 된다. 한마디 하고 싶은 직업병이 도지는 걸 꾹 참는다.
하늘에 별이 참 많다. 까만 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혔다. 이런 시골 마을에는 별을 지우는 불빛이 없으니 별이 제 빛을 마음껏 뽐낸다. 이집트 바흐레야 사막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곳의 별 하늘도 참 좋다.
4km를 걸어 조그마한 첫 번째 마을을 지나 길 끝에 있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이 이상하다. 가리키는 방향은 정면인데 길은 좌우로 나있다. 여러 사람이 여기서 우왕좌왕, 지도 검색을 한다고 잠시 어수선하다. 왼쪽으로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5분 정도 가니, 다시 산티아고 표지판이 보인다. 나중에 만난 정군은 그곳에서 아일랜드 여성 두 명이랑 오른쪽을 선택해서 1km를 가다 되돌아왔다고 한다.
2km를 더 가니 모라티노스(Moratinos)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입구에 알베르게를 겸한 카페가 있다. 크로와상 같은 빵이 없어서 그냥 나올려다가 앞사람이 토스트를 주문하는 걸 보고 기다렸다. 프렌치 오믈릿 토스트를 하나 주문했는데 이게 별미다. 그냥 나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작은 메뉴판 대부분이 토스트였는데, 주인아주머니의 특기인 모양이다.
아침을 먹으며 지나 온 언덕 저 위로 쏟아 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 잡초와 자갈이 많은 시골길, 아무렇게나 놓인 길가의 플라스틱 탁자, 다양한 모습의 순례자들, 그리고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 그 모든 것을 환하게 감싸주는 아침 햇살, 더 바랄 것 없는 충만한 아침이다.
9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니콜라스(Nicolas)를 지나고, 이 순례길의 중간이라는 사아군(Sahagún)으로 열심히 걷는다. 오늘은 발의 컨디션도 좋아서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사아 군 순례 안내소에서 하프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고 해서 마음이 급하다. 얼른 가서 증명서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다.
사아군은 세아(Cea) 강과 발데라두에이(Valderaduey)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3,000명이 채 안된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필수 지점 중 하나였다. 한때 로마인들이 점령했지만 중세 초기에 성인들인 파쿤도(Saints Facundo)와 프리미티보(Primitivo)가 순교하고 그들에게 헌정된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프 증명서
15km를 걸어 드디어 사아군에 도착, 1km를 더 걸어 순례자 사무실에 들어선다. 40944번, Bae JungChul, 11/8. 2022년에 이곳을 다녀가면서 하프 증명서를 받아간 사람들이 4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여전히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았지만 한 달에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간다. 나도 그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하프 증명서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순례자의 편지를 보는지 들어보세요
프랑스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지리적 중심인 사하군(Sahagún)의 레온주(Leonese)를 통과했으며 Codex Calixtinus에서 말했듯이 "…온갖 물건을 탕진하다. 초원이 위치한 곳,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반짝이는 뿔이 초록색으로 자라나 전사들 중 이기는 자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땅에 무릎을 꿇었도다”라고 증언하였듯이 육신의 피로와 심령의 안식을 얻었느니라.
이 고귀한 마을의 주민들은 여러분이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고 여러분을 환영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길 바랍니다
기록이 존재함을 증명합니다. 사아군, 8월 11일, 2022년 ]
증명서를 받고 사무실에서 나와 슈퍼마켓 앞에서 정군을 만났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같이 앉아서 음료수 하나 마시고, 어제 알베르게가 어땠는지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본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참 정이 가는 친구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걸었다. 발바닥이 아파서 비포장 도로 옆 차도로 올라가 갓길을 따라 걸었다. 21km를 걸어 칼자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에 도착해서 작은 예배당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맛난 납작 복숭아를 씻어 먹고, 양말을 벗어 발의 열도 식혔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길을 돌아 돌아
한참을 쉬고 산티아고 표시를 따라 걷는데,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표지판이 양쪽으로 모두 나 있다. 가야 할 마을 이름이 오른쪽으로 나 있어서 그쪽을 향해 걸었다. 길이 좋지 않았다. 새로 만든 길인지 폭은 2차선 도로를 만들고도 남을 만큼 넓었지만 자갈이 많아서 걷기에 편치 않았다. 한참 햇볕이 내리쬐는 시각, 앞서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뒤에 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이 표지판이 없으면 누가 이 길을 걷겠나?’
그러면서 걷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스마트폰 지도를 켜보니 거리가 더 멀어진다. 되돌아가라는 안내다. 그럴 수는 없어, 철길 옆에 트렉트가 지나간 길이 보여서 그 길로 내려간다. 마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숲 속을 한참이나 걷는다. 철길을 가로질러가니 옥수수밭이다. 옥수수밭의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게 10km나 이어지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길이 있으니 마을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으로 힘겹게 걷는다. 다행히 생각했던 대로 길은 마을로 이어지고, 예약한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한다. 생각했던 거리보다는 좀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이곳에 왔다.
정해진 길을 순탄하게 걸을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돌아서 걷기도 한다. 울퉁불퉁한 길, 오르막길, 편한 내리막길, 평평한 아스팔트 길, 길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우리의 삶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