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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23. 2022

제22화 알베르게에서 잠 못 드는 밤

Bercianos~Mansila de las Mulas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19일 차

#Bercianos~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a de las Mulas)

#27.49km / 8시간 08분

#숙소 : Bercianos 1900(15유로, 다인실, 2층 침대)

-침대마다 커튼이 따로 있어서 좋음. 와이파이가 고장이라 동네 카페 무료 와이파이 이용


세상 느긋한 사람들이 사는 곳

8월 12일, 05:40분, 19일 차다. 아침 기온은 17도로 높지 않은데, 밤새 열대야가 심해서 땀에 흠뻑 젖었다. 한밤 중에도 기온이 24~25도 정도로 더운데도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으니 도리가 없다. 알베르게는 비용이 들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 가정집에도 에어컨 시설이 없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이 여름을 견딜까? 오늘은 27km 구간이라 좀 일찍 서둘렀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오늘이 음력으로 칠월 십오일, 보름이다. 어제저녁에 본 달이 아직도 그대로다. 새벽길을 동행하려고 밤새 기다렸나 보다. 그 달이 걸어가는 길 저편 하늘에 낮게 떠서 같이 걷는다. 달과 별과 바람이 함께하는 순례길이다. 


어제와 그제 이용한 알베르게는 인터넷 이용이 어려웠다. 한 곳은 연결은 되는데 속도가 너무 느렸고, 한 곳은 고장이 났다고 연결 자체가 안되었다. 알베르게에 대개 와이파이 서비스를 하는데 속도는 굼벵이다. 가끔 잘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아주 만족하지 못함’ 수준이다. 빠른 인터넷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환장할 노릇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눈과 코를 박고 있는 대신 와인을 마시고 대화를 한다. 창문에 가림막을 내려 햇볕을 막고 느긋하게 낮잠을 즐긴다. 세상 느긋한 사람이 스페인 사람인 듯도 하다. 


순례자 여권(Credential)과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용 알베르게를 이용하려면 여권과 순례자용 여권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일반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을 이용할 때는 순례자용 여권을 필요 없지만, 알베르게에서는 꼭 확인을 하고 스탬프를 찍어준다. 순례자용 여권(Credential)은 출발지인 프랑스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구입한다. 여권에는 이름과 국적을 기입하고, 출발 일자를 적고 스탬프를 찍어 증명한다. 걷는 것인지 자전거를 이용하는지 표시한다. 순례길에 있는 성당, 숙소, 카페 등에서 방문 확인 스탬프(Sello)를 찍어 준다. 날짜까지 적어 주는데, 그게 있어야 사하군에서 하프 증명서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알베르게는 공립과 사설이 있는데, 공립은 10유로가 안 되는 가격이 대부분이고 어떤 곳은 사용료를 순례자가 알아서 기부하는 곳도 있다. 사설은 공립보다 시설이 좀 나은데 가격은 12~20유로 선이다. 도미토리, 1인실, 2인실(화장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가격이 다르다)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도미토리도 알베르게마다 시설이 천차만별이다. 한 방에 적게는 4명, 많게는 수십 명이 함께 지내기도 한다. 침대의 상태도 제각각인데, 상태가 좋지 않은 곳은 침대가 삐걱삐걱 소리가 많이 나고, 바닥이 울렁거려 움직일 때마다 민망할 때도 있다. 침대와 침대 사이 간격이 좁은 곳은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다. 그래서 긴 수건 등으로 가림막을 하기도 한다. 


하루에 20km 이상을 걷는 사람들이라 잘 때 코도 많이 곤다. 낮에 좀 자고 밤에 빨리 잠들지 못하면 새벽까지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친다. 물론 나 때문에 잠 못 드는 이도 틀림없이 있을 테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흔들어 깨울 수도 없으니 다들 그러려니 이해한다. 그런 불편을 겪지 않으려면 1~2인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가격이 몇 배나 되기 때문에 부담이다. 그래서 여러 날에 한 번씩, 좀 편히 자고 싶을 때 이용한다. 


알베르게에 오후 1~2시에 도착하면 다음 날 새벽까지 시간이 많다.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내리고, 침대 커버를 씌운다. 베드 버거 걱정을 많이 했는데, 침대 시트를 고무 재질로 바꾼 곳이 많고, 1회용 시트를 주는 곳이 많아 문제가 되는 곳은 없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고 낮잠을 좀 잔다. 3~4시에 일어나서 근처에 마트가 있으면 나가서 음료수나 과일을 사 온다. 작은 마을에는 마트가 없다. 알베르게에 있는 휴게소나 정원 등에서 맥주도 한 잔 하고, 다음 날 일정을 검색하고 챙겨 본다. 오늘 걸은 길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기운이 좀 남아 있으면 저녁 산책을 나가 광장 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으로 유럽의 정취를 만끽하면 된다.


신라면과 햇반

7km 지점까지는 마을이 없다. 아침을 먹으려면 두 시간 정도는 가야 한다. 그런데 걸음이 바쁘다.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마을 어느 카페에서 라면을 끓여 준다는 정보가 있어서다. 가끔 치킨이나 소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거의 매일 빵과 커피로 식사를 하니, 한국 라면은 일종의 보약이다.

한국 라면을 끓여 준다는 바로 그 카페 ‘라 코스타 델 아도베(La Costa del Adobe)’가 저만치 보인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길가 탁자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라면 먹는 사람은 없다. ‘이곳이 아닌가?’ 하며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라면이 있다. 한글로 ‘신라면 5.5€, 햇반 4€(젓가락도 있어요 ㅋㅋㅋ)’라고 적혀 있다. 라면뿐만 아니라 햇반까지 있다.


주문하고 기다리니 우리랑 다르게 긴 접시에 라면을, 보통 접시에 햇반을 준다. 달걀로 넣었는데 삶은 걸 잘게 잘라서 넣었다. 아무렴 어떤가. 하얀 쌀밥 본 지가 20일이 넘었다. 김치 없어도 맛있다. 조금 있으니 정군이 저 멀리서 온다. 정군에게도 라면과 햇반을 사 주고 든든한 배를 만지며 먼저 일어난다. 든든한 보약 한재 먹은 느낌이다. 


오늘 길은 변화가 거의 없는 길이다. 7km를 라면 먹을 생각으로 걸었는데, 다음 마을 ‘렐리에고스(Reliegos)’까지 14km는 도로를 따라 똑바로 하염없이 걷는 길이다. 이 길가 밭은 온통 옥수수다. 이곳 밭에서 생산하는 옥수수가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옥수수 총생산량보다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엘리에고스 카페에서 잠시 쉬면서 점심으로 빵을 먹고 다시 6km를 더 걸어 오후 두 시가 넘어서 ‘만시아(Mansia)’ 에 도착. 샤워하고 한참이나 잤다.


내일이 이번 1차 순례(생장~레온)의 마지막 날이다. 레온에서 하루 쉬고, 저녁에는 방 작가와 정군이랑 저녁도 하기로 했다.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 예약도 했으니 마음이 느긋하다. 오늘 밤에는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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