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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광해군의 마지막 흔적

제주 올레길 20코스

by 배정철

#제주올레길20코스 #김녕서포구 #행원포구_광해군기착지


- 김녕서포구~성세기태역길(2.1km)~하수처리장앞(4.6km)~월정해수욕장(6.9km)~행원포구 광해군 기착지비(8.3km)~한동해안도로(12.2km)~평대해수욕장(14.5km)~제주해녀박물관(17.6km)

- 총거리: 17.6km

- 소요시간: 4:43


제주에서 지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변화무쌍한 날씨를 경험하는 중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조금 쌀쌀하고 낮에는 햇살이 따뜻한 전형적인 3월의 봄 날씨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주로 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비라도 조금 오는 날이면 바람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밖에 나가보지 않아도 멀리 창밖으로 바다의 얼굴만 보고도 알 수 있다. 갠 날이 맑기만 한 것도 아니다.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여기 이곳이 청정의 섬인 제주도가 맞나 의아해진다. 사방이 온통 바다인데, 이 미세먼지는 중국에서 밤사이 바다를 건너온 것일까, 아니면 사람만큼 많아졌다는 제주도의 차량 탓일까?

오늘은 그런대로 화사한 봄 얼굴을 찾은 날. 오늘 걷는 길은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여 제주 해녀박물관까지 가는 17.6km 거리의 <올레길 20코스>다. 제주 북동쪽 김녕, 월정, 세화, 평대 해수욕장의 얕고 잔잔한 쪽빛 바다를 온종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 코스 중간중간에 이쁜 카페와 숙소가 많다. 김녕금속공예 벽화마을에는 색이 아닌 선으로 그린 벽화도 볼 수 있고, 드문드문 길가에 자리 잡은 나무 의자, 자전거, 그네, 돌탑은 여행자들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20코스 출발점에 선다. 김녕서포구 간세스탬프 뒤로 어깨높이의 돌담이 있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와 하늘이 한 폭의 추상화가 되어 배경을 이룬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하다. 김환기의 그림처럼 보는 이들을 무한히 끌어당기는 묘한 기운을 느낀다.


바다를 보며 오른쪽 마을길로 들어선다. 10여 분을 가니 바닷가에 그리 높지 않은 탑이 있다. 안내판을 보니 탑이 아니라 바다로 나간 배들의 밤길을 안내해 주는 민간 등대인 <도대불>이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이 불을 켜 놓으면 아침에 들어오는 어부들이 껐다고 한다. 1915년에 세워졌다가 태풍에 허물어져 1964년에 재건하여 전깃불이 들어오던 1972년까지 불을 밝혔다고 하니, 100년이 넘는 세월이다. 풍화된 돌탑에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어부들의 간절한 마음이 그 사이로 스몄으리라.

해안을 따라 걷는 걸음은 힘들지 않다. 오르내림이 없어 편하고, 바람이 몸을 식혀주니 호흡도 가볍다. 가끔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걸음은 더 가벼워져 발이 바람을 타고 휘적휘적 내달린다. 그렇다고 빠르고 가벼운 걸음이 좋지만은 않다. 바삐 갈 길이 아니다. 걸음이 빨라지면 걸음에 따라오는 느린 시간을 즐길 수 없다. 속도를 늦추어 얼굴에 닿는 햇살의 간지러움을 느끼고, 바람에 내 숨을 실어 보낸다. 제주 바다만의 파랑과 이른 봄의 어설픈 초록과 지난겨울의 갈색 흔적이 눈에서 뒤엉킨다. 이곳에 터전을 삼아 살다 간 그들과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느끼며 걸어야, 진정 걷는 것이다.


1시간을 걸었다. 좀 쉬어가야지. 저 멀리 청기와 3층 건물이 보이는데, 규모가 꽤 크다. 개인 주택을 아닌 듯한데, 가까이 가서 보니 의외의 건물이다. <하수처리장>이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건물 앞쪽에는 <제주밭담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잠시 둘러보고 쉬어가기 좋다.

해맞이 해안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월정리다. 아담한 포구를 지나면 월정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반대쪽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 밀물 때라 모래사장이 많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이니 썰물 때면 그 넓이가 상당하겠다. 도로 오른쪽에는 새로 생긴 듯한 카페, 식당, 펜션 등 건물이 즐비하다. 휴가철에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북적일지 상상하며 3월의 한가로움을 만끽한다. 더위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올테다.


코스의 절반 정도 지점인 <행원포구>에 중간스탬프가 있다. 바로 옆에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광해 임금의 유배, 첫 기착지비>다. 광해군(조선 15대 임금)은 폐위(1623년) 직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태안을 거쳐 인조 15년(1637년)에 제주도로 보내졌다. 제주 유배 당시, 그는 행선지를 미리 알지 못했고, 포졸들이 배의 사방을 가려 놓은 바람에 배에서 내린 다음에야 제주도라는 것을 알았다고 전한다. 그가 내린 곳이 바로 이곳, <행원포구>다. 제주에서 4년 4개월을 살다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그의 살아생전 흔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직 이곳에 기착지를 알리는 비석 하나만 서 있다. 눈이 시리도록 쨍한 하늘에 갈매기 한 마리가 끼룩대며 난다.


행원포구에서 세화포구까지는 마을길과 밭길을 걷는 길인데,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도 좋다. 식사 시간이 맞는다면 줄 서서 기다리며 먹는다는 <명진전복>에서 전복죽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평대리에서 세화를 거쳐, 종착지인 해녀박물관까지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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