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과 역 사이에 긴 풀만 자라고
- [아침 이동] 태백호텔-<7.6km, 11분>
- [7길 트레킹] 산업전사위령탑(6:50)-대조봉 전망대-용정마을-낙동정맥-통리역-미인폭포-하이원추추파크-도계 유리나라-나한정역-도계역(14:20)
- [원점 회귀] : 도계역-<기차 16:03, 27분>-태백역(16:30)-<택시, 4분>-위령탑-태백호텔
- 볼거리 : 오로라파크, 미인폭포(도로 공사 중)
오늘은 7길을 걷는 날이다. 월요일부터 시작한 걷기가 1주일, 7일째가 되었다. 어제 도착지인 태백 <순직산업전사 위령탑>까지는 차로 10분,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위령탑으로 올라갔다. 황지자유시장 앞 도로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위치가 높아서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아 보인다. 여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추모 관련 시설은 사고나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아니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위령탑 뒤쪽에 위패안치실이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다. 산업전사는 과거 탄광에서 순직한 ‘광부’들을 일컫는다. 순직 및 생존해 있는 광부들은 1970~80년대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전까지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며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탄광에서 순직한 광부의 넋은 매년 이곳 ‘순직산업전사 위령탑’에서 기리고 있다.
추모탑 뒷면에 이은상 선생이 쓴 비문을 보니 이 추모탑은 1975년에 세운 것으로 이 지역에서 일한 광부가 5만 명에 이르고, 광복 이후 강원도내 순직 광산근로자들의 총 4,112기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고 한다. 지역으로 보면, 태백이 1,788기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정선 1090기다. 추모탑 왼편에는 진폐재해순직자 위령비와 위령각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7길은 이 위령각 앞을 지나면서 시작이다. 위령각 앞을 지나면 게이트구장인데, 길 안내 표시가 명확하지 않아 헷갈리기 쉽다. 다행히 아침 산책을 하는 분에게 여쭤보니 게이트구장 앞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등산로가 있다고 한다. 대조봉 전망대까지는 1.2km의 가파른 등산길이다. 초입부터 땀 흘리게 생겼다.
우리나라 산은 언제나 사람의 발길을 반기지 않는다는 듯 초입부터 능선까지는 매우 가파르다. 초반 30분 정도 숨을 헐떡이고 나면 능선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다소 수월해진다. 고생 뒤에 낙이 있다고 힘든 산행 뒤에 보상이 있기 마련, 대조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태백시의 전경이 힘든 산행을 다 잊게 할 정도로 장관이다. 산 아래에는 황지천이 흐르고 도시 주위로는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용정마을로 향한다. 용정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최근에 정비를 많이 한 티가 난다. 중간에 숨터도 잘 꾸며져 있고 길도 넓고 평편하다. 아침의 산 공기가 맑고 상쾌하기 마련이지만 이곳 공기는 몸의 피부로 직접 파고든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몸이 직접 산소를 빨아들이면서 가벼워진다. '산소도시 태백'이라는 말을 여기서 실감한다.
5.3km를 걸어 계곡 사이에 있는 작은 용정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알로에를 재배하는 밭이 많은데 어떻게 이곳에서 알로에가 재배될 수 있는지 의아하다. 거제도에서는 기온이 높은데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걸 많이 봤는데, 기온이 낮은 이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제 점점 기온이 낮아지는 계절로 가고 있는데 알로에를 수확할 수 있을까 괜히 걱정이다. 마을 주위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궁금증만 안고 간다.
용정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면서 삶은 옥수수 반쪽을 먹고 다시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느티고개 입구까지 데크길이 만들어져 있는데도 걷지 못한다. 풀을 베어내지 않아서 걸을 수가 없을 정도다. 여기뿐만 아니라 심포리역에서 도계유리나라 쪽으로 가는 철로변과 나한정역을 지나는 구간도 풀이 웃자라서 제대로 걸을 수 없다. 7길은 아직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 더러 있어 아쉽다.
그나저나 느티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힘들다. 시멘트 포장도로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이 느티고래(느릅령)는 신라 때 임금이 태백산 천제를 올리기 위해 소를 몰고 넘던 고개이며, 조선시대에는 태백산을 향해 망제를 올리던 곳으로 우보산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힘들게 올라오느라 정신줄을 놓았는지 여기서 알바, 길을 잘못 들어 1km를 오르내리고 되돌아왔다. 느티고개 정상에서 약간 우측으로 난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직진 방향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다. 거기다가 느티고개에서 다시 긴 계단을 오르고 나면 가파른 내리막이다. 7길은 초반 대조봉을 오르는 구간과 느티고개, 그 이후 산을 넘는 구간이 힘들다.
산을 넘어 내려오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통리역>이 바로 보인다. 산골짜기 오지에 들어선 작은 역사, 통리역. 1940년 통리역이 영동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인근 지역에 급속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인근 태백, 사북, 고한 등지에서 생산된 석탄들이 통리역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역 인근에 광산 사무실과 저탄 사무실, 숙박시설, 상점들이 들어서고, 오일장도 열리게 되었다. 1963년 통리-심포리 간 인클라인 철거와 함께 현재의 역사도 지어졌지만, 역할이 줄어들면서 결국 1994년 소화물 취급 중지, 2012년 솔안터널 개통으로 최종 폐역되었다.
현재 역사는 국내 최고, 최초의 철도체험형 리조트 하이원 추추파크의 레일바이크 정거장으로 이용되며 여전히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함도 잠시 일요일인데도 레일바이크는 모두 멈춰 서 있다. 멀리 경남 밀양에서 단체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온 관광버스가 한 대가 와 있는 게 전부다. 일행을 따라다니기에는 다리가 편치 않은 분들은 역사에서 옹기종기 얘기를 나누고, 나머지 분들은 전망대로 몰려간다.
통리역을 돌아 나오니 <태양의 후예 공원>에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키스하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현실에서는 이미 갈라선 두 사람의 다정스러운 모습은 아직도 여기 이렇게 추억 속에 잠겨있다. 인적 없는 태후공원에서 청동은 더욱 반짝거린다. 3층 짜리 경동 아파트 단지를 지나 철로와 도로가 만나는 교차점 주변으로 식당과 상점이 제법 모여 있다.
여기서 좌측 철로를 따라 다시 통리역 쪽으로 걷다가 통리재 정상, 통리삼거리에서 잠시 멈춰 선다. 원래 노선은 오른편 미인폭포 쪽으로 가야 하지만 공사 관계로 노선이 변경되었다는 안내판이 있으니 잘 보고 가야 한다. 변경된 코스를 따라가면 미인폭포는 볼 수 없다. 변경 노선은 통리재를 지나는 차도를 따라 직진 방향이다. “해양동굴 관광도시 삼척시입니다”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100여 m 되는 이 구간도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길을 따라 걷기 힘들다. 인도가 별도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풀이 길어 차도로 내려 걷는다.
삼척시 표지석을 지나면 '하이원추추파크가 1.2km'라는 표시가 있다. 길은 하이원추추파크 내부로 나 있다. 여기서도 운탄고도 안내판이 잘 보이지 않아서 헷갈리기 쉬운 곳이다. 추추파크 끝에 레일바이크 정비소가 있는데 그 옆을 지나 철로변을 따라 걸으면 <심포리역>이 나온다. 역사는 폐역 된 지 오래고 철로에는 풀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다. 소지섭, 손예진 주연 2018년 개봉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촬영지였다는 안내판이 한 때 이곳의 인기를 다소 우울하게 상기시킨다.
역을 지나는 길은 녹슨 철로가 아니면 길이 있다는 걸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풀이 자라 있다. 한참 지나 철길 건널목이 나오는 곳에서 오른쪽 길이 <도계 유리나라>로 가는 길이다. 큰 도로를 건너 도계유리나라 입구로 들어간다. 바로 옆에 <도계 나무나라>도 있다. 아이들이 체험활동 하기 좋은 곳인 듯 주말인데도 찾는 이가 별로 없다.
도계 유리나라 정원 쉼터에서 잠시 쉬는데 하이원추추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빨간색 5량짜리 이벤트 열차다. 다음 폐역인 나한정역, 흥전삭도마을까지 왕복 운행하는 열차인 모양이다. 나한정역에서 흥전삭도마을까지는 철로변에 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가마니를 깔아놔서 길인 줄을 알겠는데 긴 풀 때문에 한 발 한 발 옮기기가 힘들 정도다. 위험하지만 철로로 올라와서 걷는 게 낫다. 혹시나 올지도 모르는 열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걷는데, 삭도마을 근처에 가니 1시간 전에 지나갔던 추추열차가 되돌아온다.
삭도마을은 작지만 예술적 분위기가 감도는 정겨운 마을이다. 삭도는 공중에 매달린 밧줄에 운반기를 설치하여 여객 또는 화물을 운송하는 교통수단을 말하는데, 삭도마을에는 석탄을 운반하던 삭도를 복원하여 설치 미술 작품처럼 설치해 놓았다. 지금 삭도마을에는 시커먼 탄가루가 날리지 않는다.
여기서 도계역까지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도계역에 도착해서 거의 2시간을 기다려 태백으로 되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8시간을 걸어간 길을 기차로 돌아오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 황지자유시장의 <한솔식당> 소머리국밥 맛은 그동안 먹어 본 소머리국밥 중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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