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옛 그림의 여백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by 배정철

2014년 3월부터 6월까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 박물관에서 간송문화전 1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가 열렸습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의 소장품 중에서 주제별로 묶어 DDP에서 전시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간송미술관의 이전 이름은 보화각입니다. 보화각의 설립자인 전형필의 아호를 따서 간송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재 전시보다는 문화재 보호와 연구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라 소장품에 대한 관람을 까다롭게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전에는 관람 기회가 봄과 가을에 각각 2주일뿐이었습니다.


2013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된 이후, 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취지로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문화재가 동대문 광장으로 나온 것입니다. 2017년 4월부터는 9번째 전시회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다시, 바라보다’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는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제70호), 동국정운(국보 제71호), 난중일기(국보 제76호), 충무공 장검(보물 제326호) 등 우리 민족의 영웅인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문화재들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를 향한 우리 민족의 DNA

그동안의 간송문화전을 다 보진 못했지만, 1회 전시회에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과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 호)이 나란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도자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도자기를 마주 하면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술품을 체험하는 동안 완전히 반해서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반응이란 기실은 우리 내면 영혼의 울림이다.”라고 오주석이 말한 것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도자기에서 나오는 청자 빛과 투박한 흰 빛에 넋을 놓게 됩니다. 고려청자의 청아함과 백자의 순수함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은 아마도 우리 민족의 DNA 속에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백자청화철재동채초충난국문병, 사진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그들이 서 있는 자태는 또 어떤가요. 청자는 화려한 복식을 갖춰 입은 귀부인의 모습이고, 백자는 수수한 조선 여인의 모습입니다. 시선이 청자와 백자의 표면으로 옮겨 갑니다. 청자 표면에는 둥근 원안에 학의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천 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로 날갯짓을 하며 날아다닙니다. 백자로 눈길을 돌리면 진한 국화 향이 코끝에 와 닿습니다. 학과 나비, 구름과 국화는 수백 년 세월에도 그 생명력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득 이 도자기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 도자기를 만든 장인과 그것을 간직해 온 사람들, 그들의 아들, 그 아들들의 손으로, 때로는 다른 이의 손길로 이어져 온 그 긴 세월을 도대체 어떻게 견디며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요?


우리 옛 그림에 대한 관심

이렇게 우리 옛 그림과 도자기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오주석 때문입니다. 그가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으로 있을 당시 ‘미술을 통한 세상 읽기-옛 그림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2003년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이라는 책으로 펴낸 것을 접하고부터입니다. 평소 창의성 교육에 대해 관심을 많았는데, 창의성 공부를 하다 보면 그림이나 음악, 조각 등 예술 작품에 대한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탁월한 창의성을 발휘한 사람들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다른 분야에 비해 그림에 대한 책이 많고, 그림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친근하고 편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미술 작품과 화가를 통해 창의성을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네의 '인상: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사진 출처=마르모탕 미술관>

예를 들면, 19세기 인상파가 그렇습니다. 인상파라는 말은 모네가 그린 ‘인상, 해돋이’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런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 창의성 발현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당대 파리 미술계를 지배한 것은 아카데미였습니다. 기존의 아카데미 화풍인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고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따른 자연과 사물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 인상파입니다. 세잔의 사과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 같은 입체파와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은 아니지만 마르셀 뒤샹의 변기 ‘샘’은 현대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여전히 존중받고 있습니다. 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시도된 작품은 이전까지 없었던 것을 창조해 내는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의 미술과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이 오주석의 책으로 인해 우리의 옛것으로 옮겨 붙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옛 그림 따라가기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책 표지에 있는 송하맹호도의 한 부분인 호랑이의 눈빛이 강렬합니다. 우리 옛것에 대한 저자의 마음을 담아낸 듯이 말이죠. 그래서인지 책을 펴는 순간부터 쉽게 빠져 들고 맙니다. 강연한 내용을 교정하여 책으로 풀어쓴 탓도 있지만, 저자 특유의 부드러움과 진솔한 말투, 그러면서도 학자로서의 그의 노력과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이 책 여기저기에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저자의 걸음을 느릿느릿 따라가다 보면,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이나 역사 시간에 배워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옛것의 진한 향기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김홍도, 씨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씨름(단원풍속첩 중 종이에 수묵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몇 명이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스물두 명이나 되더군요. 그림 중앙에서 씨름이 한창인 씨름꾼의 승부는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그림을 찬찬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승부를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의 신분이 다른 것도 보입니다. 씨름 경기가 한참이나 되었는지 비스듬히 누운 사람도, 저린 다리를 펴고 앉은 사람도 보입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선수의 긴장감도 느껴집니다. 투박한 붓으로 쓱쓱 그린 듯한 선과 점으로 사람들의 미세한 표정을 담아낸 김홍도의 마음을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 그림을 본다는 건 단순히 씨름 장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림을 보고 있는 저를 씨름판의 어디쯤에 놓이게 합니다.


오주석은 말합니다.

선인들의 그림을 잘 감상하려면 첫째,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둘째, 옛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공부 더한 사람이 그림을 더 잘 보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사랑하고 생태를 알고 찬찬히 눈여 겨보는 것이 더 중요해요.

2005년, 49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저자의 생이 안타깝습니다. “생전에 그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가진 존재(人者天地之心也)라는 말을 즐겨 썼다. 비록 지금 세상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잊은 채 약삭빠른 천박함이 판을 치지만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가 남긴 글과 마음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유산이 됐다.”라는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이 우리 옛 그림의 여백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머무릅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오주석, 『그림 속에 노닐다』, 솔, 2008

故 오주석 선생의 3주기를 맞아 간행된 유고집으로, 옛 그림 읽기의 재미와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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