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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Jul 09. 2018

창의성: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3장 중년을 채워야 할 것

현대 미술의 면상에 변기를 집어던지다

현대미술은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을 의미한다. 통상 모더니즘 실험 정신을 추구하며 과거의 전통을 버린 예술을 말하는데, 야수파, 독일의 표현주의, 프랑스의 입체파, 이탈리아의 미래파, 소련의 구성주의,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 그리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 20세기에 폭발적으로 등장한 거의 모든 미술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자유로운 사상의 향연이 펼쳐지도록 기폭제 역할을 한 예술가가 있다. 이른바 '소변기 사건'으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다.


실제로 2004년 12월 영국에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미술작품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당시, 올해의 터너상(Turner Prize) 시상식을 앞두고 영국의 미술전문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설문 조사에서 1위를 한 작품이 바로,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 1917)이다. (2위는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3위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마릴린 먼로 두 폭(Marilyn Diptych, 1962)>, 4위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 1937)>, 5위는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의 <붉은 화실(The Red Studio, 1911)> 출쳐= BBC NEWS 'Duchamp's urinal tops art survey', 2004.12.1 기사)

< 마르셀 뒤샹의 '샘' >


프랑스에서 태어난 뒤샹은 191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독립예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한다. 그는 이 협회의 이사이자, 1917년에 열린 제1회 정기 전시회의 조직위원을 맡게 된다. 조직위원이기도 한 그는 가명인 리차드 뮤트(Richard Mutt)라는 이름으로 작품 하나를 출품하는데 그것이 바로 '샘'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배관공 가게에서 소변기 하나를 사서 작품명을 '샘'으로 정하고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한 후에 전시회 작품으로 제출한 것이다.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이 전시회에는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누구든지 작품을 제출하고 전시할 수 있었다. 이 소변기를 본 전시회 조직위원들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전시를 거부한다. 예술가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도 아니고, 작품이 외설적이라는 이유였다. 작품 전시를 주장한 뒤샹은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회 이사 자리를 사임하고, 언론에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등 전시회의 행태에 반발한다.


루브르가 힙합을 품다

'루브르는 왜 비욘세에게 모나리자를 내줬나' 조선일보 문화면에 게재된 기사다(2018.7.2.). 7월 16일에 공개된 팝계 세기의 커플로 통하는 팝스타 비욘세(Beyonce)와 레퍼 제이지(Jay-Z) 부부의 뮤직비디오 '에이프쉿(Apeshit)'의 촬영 무대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내용이다. 전통의 루브르가 현대의 가장 대중적인 음악인 힙합의 뮤직비디오 촬영 무대가 된 것 자체만으로도 기사거리임에 틀림없다. 이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조회수가 이미 6,000만은 넘었다(2018.7.7 현재  6,232 만회다. 조선일보 기사가 나올 당시에는 2,000만 회였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관심이다. 주간지 타임(Time)도 루브르 박물관이 이들에게 촬영 허가를 내준 것만으로도 '기념비적'이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루브르의 아폴로 갤러리의 천장을 훑고 지나가던 카메라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 서 있는 제이지와 비욘세의 모습을 비춘다. 평소 이곳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인데, 텅 빈 홀에 두 사람만이 서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배경으로 승리의 여신과 같은 하얀색 옷을 입고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그곳에서 막 결혼식이라도 올리는 듯 보인다. 그 아래 계단 여기저기에 댄서들이 누워있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뮤직비디오는 루브르 박물관의 유명 작품과 댄서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중에 압권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앞의 비욘세와 댄서들의 군무다. 1804년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을 그린 그림에는 교황 비오 7세도 보인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화려한 19세기 의상을 입고 엄숙한 식을 거행하고 있고, 이 그림 앞에서는 속옷만 입은 듯한 댄서들과 비욘세가 관능적인 춤을 춘다. 그야말로 충격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전통을 옹호하는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파격을 받아들였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욘세와 제이지, 두 사람은 모나리자를 향해 돌아선다.

< 사모트라케의 니케 앞에 서 있는 비욘세와 제이지, 'Apeshit'의 한 장면 >

뉴욕타임스가 "유럽 문화의 요새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흑인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분석한 것처럼, 두 흑인 가수가 서양에서 미의 기준이 되는 모나리자 앞에 선 것은 그 선입견과 편견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도 여기에 있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것이다. 특히 나폴레옹 황제가 아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백인들만이 가득 찬 그림 앞에서 아홉 명의 흑인 댄서들의 춤은 백인 중심의 서양 미술사에 대한 항거의 몸짓이다.하지만 이 뮤직비디오가 그토록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단지 심오한 정치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뒤샹과 비욘세가 던진 질문

뒤샹의 '샘'이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예술에 대한 수많은 논란과 더불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이 아니라면 예술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인가? 예술가가 직접 빚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가 아니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발상과 아이디어가 중요한가? 기성품이 아닌 새롭게 만든 것만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기준을 정하는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대중과 예술가들에게 쏟아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예술 사조와 주의, 주장들이 생겨났다. 뒤샹이 뿌린 씨앗 덕분이다.


뒤샹은 이 사건에 대해 예술가가 직접 자기 손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작품으로 제출한 소변기는 일상에서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지만, 작가에 의해 '새로운 선택'이 이루어지고, 전시장에 놓임으로써 '새로운 기능'을 가지게 되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물'이 된다는 것이다. 기성품을 본래의 기능적 역할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준 후,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배경지식을 뒤집음으로써 실질적인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뒤샹은 자신이 고안해낸 새로운 예술방식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했다. 기성 조각품이라는 뜻이다.


뒤샹의 소변기를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선택한 조사 결과에 대해 미술 전문가 시몬 윌슨(Simon Wilson)은 "현대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인 뒤샹의 '샘'(Duchamp 's Fountain)을 피카소(Picasso)와 마티스(Matisse)의 작품에 앞서 선택하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예술의 역동적인 성격과 예술 작품에 들어가는 창의적인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 즉 작품 그 자체가 무엇이든 만들어질 수 있고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라고했다. 그의 평가는 뒤샹이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비욘세와 제이지가 뮤직비디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서구 사회에 만연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우아한 반격이라고 한다. 또 돈을 많이 번 힙합 가수들이 보석, 시계, 자동차나 비행기 등으로 부를 과시하지만 이들은 그 보다 한 차원 높은 미술품으로 자신들의 부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대중 문화인 힙합과 고전의 대명사인 루브르 박물관의 만남은 단지 '홍보'나 '정치적 의도'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부의 과시와 정치적 목적은 오히려 부수적인 것일지 모른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그 발상과 아이디어의 신선함이 아닐까? 루브르가 힙합을 받아들였다고? 유럽 문화의 요새인 루브르가 대중문화의 기수인 힙합에 순순히 성문을 열었다고? 사람들은 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 놀랐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이 변할 때의 놀라움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고전과 전통의 대명사인 루브르가 변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뉴욕의 할렘가에 사는 흑인과 스페인계 청소년들 사이에서 생겨난 힙합이 21세기의 주요한 문화라는 것을 루브르가, 아니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비욘세와 제이지의 노래와 몸짓은 고전과 현대, 황제와 대중, 백인과 흑인의 만남과 융합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외침이다.


신세계가 열린다

새로움과 창의성은 흔히들 젊음과 동일시된다. 젊은 사람들이 머리 회전이 빠르고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 당연히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이들에게서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버트 아인슈타인도 '30세가 되기 전에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창의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시기가 있고, 그것은 바로 젊었을 때라는 의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인간은 녹슬고 무뎌진다는 말이다. 위대한 창조적 업적을 이룬 이들 중에 20~30대의 젊은 천재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심리적 불안감을 연출하는 영화로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등 그의 생애에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60세 전후에 만들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로스트도 60대에 절정기를 맞았다. 60대에 쓴 그의 시들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을 마흔아홉에 출간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완성한 것은 마흔여섯, 저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린 것은 50대의 나이에 들어서다. 그 외에도 중년 이후에 자신의 과학적 발견, 예술적 성취, 학문적 업적을 이룬 이는 수도 없이 많다. 나이가 들었다고, 중년 이후에는 현상 유지나하고 변화에 그럭저럭 적응해 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1960) >

그렇다고 나이가 든 사람이면 누구나 창의적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어제까지 없던 일이 오늘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어제까지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 내일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어느 분야에서든 창조적 성취와 위대한 업적은 오랜 기간 동안의 작은 성공과 실패, 시행착오라는 밑거름을 요구한다. 젊은 날의 실패와 성공의 경험, 희로애락의 일상들이 모두 창조적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창의성의 필요조건은 아닐지라도, 쓸모없음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중년들이여, 미리 포기하지 말자. 다만 몇 가지만 유념하자. 우선, 집단사고에 빠지지 말자. 지나친 자신감을 갖고 남의 평판을 의식하면 집단사고에 빠지기 쉽다. 집단에 오래 소속되어 있었을수록 그 위험성이 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집단의 가치를 위해 개인의 가치를 뒤로 미루지 말자. 개인의 존재 가치가 커질 때 창조의 힘도 커진다. 그러면서 나만의 것을 찾자. 국가와 사회, 직장과 가정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를 채우자.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든, 휴식을 위해서든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자. 그러면 삶의 틈이 생기고, 그 틈새로 기존의 세상을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

< 피카소의 ‘황소머리’(1943), 폐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을 떼어내어 만든 작품 >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천하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더 젊어지고 새로워진다.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자.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만큼의 발칙함은 아니더라도, 모나리자 앞에 선 비욘세와 제이지의 노래와 춤을 즐길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참고도서

오리지널스, 애덤 그랜트, 한국경제신문, 2016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장석주, 문학세계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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