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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Dec 16. 2018

길 위의 중년_사람은 가고 꽃은 지고

여행 하나, 백제의 옛 도읍 부여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 무량사

무량사는 부여 외곽에 있다. 부여 시내에서 서쪽으로 20~30분 거리에 있는 만수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거리상으로는 부여군청 보다는 보령시청이 더 가깝다. 무량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이 생의 마지막을 한 곳으로 알려진 절이다.

주말인데도 무량사 앞의 넓은 주차장이 거의 텅텅 비어 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주차장 바로 옆에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 밖에는 직원이 전혀 안 보이고, 매표소 안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하루 종일 드문드문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일이 관광객이 많아 바쁜 것 보다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에서 본당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급하지 않는 경사를 이룬 길을 따라 올라간다. 시멘트 블록으로 길을 포장해 놓아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천왕문에 서서 보는 풍경이 특이하다. 천왕문이 마치 사진기의 프레임처럼 절 안의 모습이 그 속으로 들어 온다. 오른쪽에 선 노송의 푸른 솔잎이 땅에 닿을 듯이 내려와 있고, 그 아래로 조그마한 석등과 그보다 크고 높은 오층석탑이 보이는데 그 뒤로 이 절의 본당인 극락전이다. 오층석탑이 극락전의 중심을 가리고 있는 모양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모양새가 아주 닮았다. 석탑 앞에 있는 설명 자료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 무량사 천왕문에서 바라본 극락전 >


다른 절과 다르게 무량사에는 대웅전이 없다. 대신 극락전이 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불상도 그 곳에 있다. 극락전은 팔작지붕의 2층 건물이다. 하늘을 향해 살짝 치켜 오른 지붕 끝자락의 맵시가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처마 아래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나무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극락전은 다포 양식이다. 1층과 2층 지붕아래 공포가 빼곡하다. 극락전 내부천장은 단순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채색이 화려하다.

극락전 뒤쪽, 작은 개울 건너편에 삼신각과 청한당이 있다. 삼신각 오른쪽에 있는 청한당은 소박한 민가의 모습이다. 청한당은 김시습의 호를 따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마루에 앉아 그가 여기 머물며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려서부터 천재소리를 듣던 그가 이런 산속에 들어와 목탁 소리를 들으며 보낸 시간은 어떠했을까? 김시습의 영정은 극락전 왼편 작은 영정각에 모셔져 있다. 상반신만 그려진 작은 그림이다. 갓 아래의 둥근 얼굴의 부드러움과는 다르게 짙은 눈썹과 맑은 눈에서 강인함이 묻어난다.

그의 부도는 절 안이 아니라 바깥에 모셔져 있다. 매표소에서 50여 미터 내려가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무량사 부도단이 있는데 그 중심에 '오세 김시습'의 부도가 있다. 세종대왕이 그의 영민함을 익히 들고서, 다섯 살의 그를 불러 글을 짓게 하였다는 일화로 인해 붙여진 호다. 부도 앞에는 '五歲金時習之墓(오세김시습지묘)'라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누군가 막걸리 한 잔을 붓고 절이라도 하고 갔는지 하얀 종이컵이 그 앞에 놓여 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여 세상을 등지고 승려가 된 그의 생애가 잠시 스쳐지나 간다. 무량사 앞에도 여느 절 앞처럼 음식점들과 가게들이 제법 있는데 찾는 사람들이 없는 듯 한적하고 쓸쓸하다. 김시습의 생애도 그러했으리라. 무량사를 찾은 나로서는 번잡하지 않은 점이 좋긴 한데, 그들의 생계가 괜스레 걱정이 된다.


백제의 흔적, 낙화암과 고란사

무량사를 뒤로하고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미리 찾아 본 맛집 <장원 막국수>로 먼저 갔다. 백마강 유람선을 탈 수 있는 구드래 선착장 가까이에 있는 오래된 국수집이다. 오후 3시경이라 한창 점심때가 지난 탓인지 바로 자리가 있다. 막국수와 수육을 주문했다. 맛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별루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국수에 수육을 같이 곁들여 먹어야 맛있다고 하는데 이래저래 먹어봐도 줄서서 기다리며 먹을 맛은 아니다.

점심 후에는 백마강 유람선을 탔다. 고란사 선착장까지만 가는 편도. 2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타 본 경험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다. 그 때는 물안개가 짙게 깔린 이른 아침 시간이었고, 강에 물오리들이 아주 많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배를 타는 시간은 10여 분.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배의 스피커에서 울리는 옛 노래가 강을 따라 흐른다. 배의 엔진소리와 사람들의 웃는 모습과 애절한 노래 속에서 천오백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그 속에서 백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 백마강에서 본 부소산성 >

고란사 선착장에 내려 다시 매표를 하고 고란사로 난 길을 딸 걸었다. 아쉽게도 고란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예스럽지도 애달프지도 않다. 고란사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기념품 가게가 그렇고, 좁은 마당을 한창 공사하는 모습도 그렇다. 그나마 고란사 뒤쪽 약수터가 이 절에 온 수고를 씻어 준다. 학생들을 인솔해 온 젊은 선생님이 설명하는 소리를 들으니, 약수를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물맛이 참 달다.

고란사에서 계단을 따라 한참 걸어 올라오면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낙화암에 이른다. 낙화암에 있는 누각도 역시나 공사 중이다. 낙화암 절벽 난간에 서 보니 강 수면까지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나당연합군의 군사들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왔을 때 입술을 깨물며 저 강물로 뛰어 들었다는 삼천궁녀를 상상해 보는 것도 역시나 쉽지 않다. 천오백년 전의 아픔이 서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역만리에서 온 빅토리아 연꽃이 핀 궁남지

부소산성 정문에서 남쪽의 7∼800 미터 거리에 정림사지가 있고, 다시 남쪽으로 그 정도의 거리에 궁남지가 있다. 궁남지는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地)다. 백제의 별궁 인공 연못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밭이다. 7월에 연꽃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8월말에 이곳에 왔으니 연꽃을 볼 수는 없다. 길거리 사진사들이 찍어서 세워 놓은 사진을 통해 그 화려한 자태를 그나마 감상할 수는 있다. 때는 지났어도 사람 키 정도나 큰 물토란, 작고 노란 물양귀비, 쭈글쭈글한 가시연 등 평소에 보지 못했던 식물들이 물속에 뿌리를 박고 빼곡히 서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빅토리아연꽃 하나가 여전히 지지 않고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세워두고 오랫동안 카메라에 담는다. 천오백 년 전,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파서 꽃을 즐겼던 이곳에서 이역만리에서 온 낯선 연꽃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다. 사람은 가고, 꽃은 지고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나는 단지 그 찰나의 순간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을 뿐이다.

     

< 궁남지에 핀 빅토리아 연꽃 >


하루 여행 둘, 백제의 미소를 찾아서     


책이 읽고 싶어지는 곳, 추사고택

이번 여행지는 충남 서산이다. 서산마애삼존석불, 상왕산 개심사, 해미읍성을 둘로 볼 참이다. 첫 방문 예정지인 서산마애삼존석불로 가다가 계획을 바꾸었다. 서산마애삼존석불을 보러 갈려면, 고속도로에서 내려 충절의 고향 예산을 지나 서산으로 가야하는데 그 초입에서 '추사고택'이라는 안내판을 봤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가끔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하니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림길에서 20여분만 가면 되는 거리라 주저 없이 차를 돌렸다.

토요일 아침 10시.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충남 예산 추사고택 앞 주차장은 텅 비었다. 주차장이 상당히 넓은데 주차된 차가 없으니 더 넓어 보였다. 추사고택은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좌측에는 새로 지은 추사기념관, 그 오른쪽 약간 뒤쪽으로 추사와 두 부인을 합장한 묘가 있다. 그 옆이 추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추사고택이고, 고택 앞 안내실 뒤로는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화순옹주 정려문, 그리고 추사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들이 있는 백송공원이 쭉 이어져 있다.       


추사고택에 들어서 보니 아늑하다는 느낌이 든다. 설명 자료를 보니 추사가 살던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에서 문 밖을 내다보면 이 고택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산을 뒤로 하고 자리를 잡은 고택이 지역 전체를 두루 내려다보는 형세다. 집의 위치만 보아도, 당시 이 고택에 살던 가문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추사고택은 세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바로 사랑채다. 집안의 바깥어른이 기거하는 곳이다. 좌측으로는 제법 너른 마당이 있고 오른쪽에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잠시 가을 햇살을 안았다. 책이 읽고 싶어진다. 역시나 추사가 살던 시절에 이 사랑채에는 몇 천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의 기둥과 벽에는 추사의 글씨들이 많이 보인다. 낯익은 그림도 한 점 걸려있다. 제주도 유배 당시,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준 '세한도'다. 사본이라고는 해도 고택에 걸려 있기에는 좀 조잡할 정도라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그림을 사랑채에 걸어 놓은 이는, 세한도에 얽힌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이야기도, 소전 손재형 선생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인 후지쓰카에게서 되찾아 온 벅찬 감격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사랑채 뒤로는 안채다. 안주인이 사는 곳이며 집안 음식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랑채와 안채는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부부라 해도 조선시대의 그 유별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부부가 이렇게 살면서도 여러 자식들 낳고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내 말에 어째 그런 생각만 하냐며 아내가 타박을 준다. 옛집의 모양이 다 이러한 건 아니다. 경주 양동마을의 관가정이나 서백당처럼 안채와 사랑채가 마루로 연결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런 곳에서는 늦은 밤에 사랑채에서 안채로 조심조심 건너가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 보기에 좋다.

안채 뒤로는 사당이 있다. 집안의 조상들을 모시는 곳으로 양반가 주택에는 대부분 집의 제일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이 사당에는 추사 김정희의 영정이 한 점 걸려있다. 술잔이나 향불 피운 흔적 하나 없는 걸 보니 씁쓸하다. 돌계단을 쓸고 있는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고택 주위에는 후손들이 전혀 살지 않는다고 한다.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

추사고택을 나와 원래 계획했던 목적지로 향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그 길만큼 더 가면 서산 용현리에 닿는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을 사진으로 보면 아주 친근한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설레었다. 첫 만남이 주는 설렘은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리라.

주차장에서 걸어 10분 거리.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야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삼존불을 마주한다. 중앙에 제일 큰 모습의 미륵불, 좌측에는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에 반가사유 보살좌상이다. 우리를 쳐다보고 웃는다. 천년을 넘어 세상에 빛을 주는 백제의 미소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둥근 얼굴, 서글서글한 눈매, 커다란 콧망울, 올라간 입꼬리, 얼굴 전체에 미소가 퍼졌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2(생각의나무, 2007)』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은 종교적 신성을 모두 털어버리고 생로병사를 수용하는 인간의 현세성을 나타낸 표정이라 했다. 부처보다는 인간 쪽으로 훨씬 가깝게 다가왔다는 의미다.

상상했던 것 보다는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백제 후기에 만들어진 후, 지나 온 세월에 비해 새김이 선명하다. 삼존불 위에는 마치 처마처럼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는데 그 바위가 비바람으로 부터 불상을 보호하고 있어 보존이 더 잘 되었다고 한다. 30년 전에 한 번 와 봤다는 어느 관광객의 말에 의하면,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이 불상을 그대로 떼어내어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했다고 한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바위의 옆면을 자세히 보니 인공적으로 파낸 흔적들이 보인다. 이 불상을 여기 이 바위에 새겨 천 년의 미소를 우리 곁에 남겨 둔 백제의 장인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하니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미소 >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와 개심사로 가기 전에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주차장 옆에 있는 식당 용현집에서 계곡 옆에 내어 놓은 식탁에서 손님들이 먹는 어죽 냄새가 허기를 참지 못하게 했다. 주문한 지 10여분 지나서 어죽이 나왔다. 빨간 국물에 하얀 국수 면발이 보인다. 주걱으로 저어보니 국물 아래에 밥알도 있다.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하다. 반찬은 깍두기와 열무김치 단 두 가지. 어죽은 맵지도 않고, 비리지도 않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강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입맛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그 맛이 백제의 미소를 닮았다.


단아한 정취, 서산 개심사

삼존불 주차장에서 개심사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걸어서 산을 바로 넘어가는 길과(4km, 90분), 차로 산을 돌아가는 길이다 (13km, 20분). 절 입구에는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식당들과 약초를 파는 할머니들이 있다. 그 광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인지, 아니면 조용하고 한적한 절인지 표시가 난다. 개심사는 후자다. 일주문은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기단의 화강암이 깨끗하고 기둥과 천장의 채색이 선명하다. 일주문을 지나 포장된 길을 500여 미터 올라가면 거기서 부터는 돌계단이다. 숲과 개울과 어우러진 돌계단이 운치가 있다.

돌계단 끝에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은 연못과 배롱나무다. 연못에 가지를 드리운 배롱나무에 백일홍이 다 피어 있었다면 그 풍경이 어땠을까 싶다. 연못을 지나 올려다 보이는 것은 범종각이다. 이 절에는 흔히 있는 사천(왕)문이 없다. 범종각이 절의 제일 앞쪽에 나와 있다. 기둥과 보의 단청이 바래긴 했지만 화려하다. 특이한 점은 기둥과 보의 생김새다. 모두 구불구불하다. 일자로 반듯한 나무를 쓴 게 아니라 못난이들을 가져다 목재로 삼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참을 쳐다보게 된다.      

< 개심사 종무소 >

개심사 전체 구조는 좀 특이하다. 본당인 대웅보전 맞은편에는 안양루, 왼편에는 심검당과 종무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무량수전이다. 크기 않은 직사각형 모양의 마당을 두고 건물들이 사방으로 이어서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에서 보이는 안양루의 큰 창문이 아니라면 답답할 수도 있는 구조다. 이 절의 대웅보전이 보물 제143호로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이고, 내부는 주심포계라 조선 시대 다포계 목조건물의 귀중한 자료라고 하는데, 열심히 보아도 내 눈으로는 그 귀함을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심검당과 잇대어 있는 종무소 입구의 기둥과 보의 자연스러움과 세월의 흔적이 더 귀하게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그 속에 서서히 사라짐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절을 내려오니, 식당주변 큰 나무 밑에서 강아지들이 장난을 치고 논다. 이제 겨우 두세 달 된 어린 녀석들이 다섯이나 된다. 자기네들끼리 깨물고 뒹구는데 나도 그 틈에 끼어 한참이나 놀았다. 표고버섯 한 봉지와 자두 몇 개를 산 후,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옛 슬픔을 품어 안은 해미읍성

개심사에서 해미읍성까지는 15분 거리다. 가는 길에는 대관령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낮은 언덕의 목장들이 펼쳐져 있다. 소떼들은 보지 못했지만 색다른 풍경이다. 해미읍성은 추사고택이나 개심사와는 다르게 찾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주차장도 다 찼고, 정문 앞 분식점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정성을 들여 다시 정비를 한 듯, 크고 작은 돌들이 층층이 5미터 높이의 성벽을 단단히 이루고 있다. 자료를 보니 전체 둘레가 1800미터라고 한다.

해미읍성 안에는 놀이가 한창이다. 사물놀이 패가 잔디밭에서 사람들과 흥겹게 어울리고,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은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앉았다. 아이들은 연을 날리기도 하고 공놀이도 한다. 가운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른편에 옥사가 있고 그 앞에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나무가 있다. 이 옥사와 회화나무는 1790년부터 100년 동안이나 천주교도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이가 3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옥사 안에는 태형을 치던 곤장대가 마당에 놓여 있다. 회화나무에 철사를 걸어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메달기도 했다는데, 지금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과 오버랩 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인간들의 고난과 슬픔을 보고 듣고 온 회화나무의 마음이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해 본다. 나오는 길, 정문 옆 화단에 핀 해당화의 짙은 분홍색이 눈에 깊이 들어온다.     

<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

서산은 해가 지는 고향으로 알고 있는데, '해뜨는 고장, 서산'이라고 홍보를 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그런 홍보 문구가 보인다. 해가 진다는 것은 사그라진다, 사라진다는 의미와 통하므로 주민의 열망인 '발전'에 반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가 진다고 해서 영원히 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서해 바다로 넘어간 해는 내일이면 동해 바다에서 다시 떠오른다. 천 년 전 백제는 멸망했어도 그 자리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있듯이. 옛 사람은 가더라고 세상에는 새 생명의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리라. 해가 진다는 것은 해가 진 다음에 오는 긴 밤과 곧 다가올 새벽을 예비하듯, 꽃이 진 나무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이 움틔울 것이다.       


구름이 많이 낀 날이 아니었다면 서해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서 늦여름의 태양이 바다 속으로 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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