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꼰대 생각

꼰대 생각 08_성적자기결정권

by 배정철

초등교사를 하다가 2000년에 교육부 교육전문직에 응시해서 교육연구사 일을 시작했다.
첫 발령 부서가 어이없게도 ‘여성정책담당관실’이었다.
맡은 업무는 더 황당했다.
양성평등과 성교육업무였다.

그때 모 종교단체에서 실시하던 ‘순결교육’이 논란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여학생들에게 순결교육을 하면서 은장도를 나눠 줬다.
학교에서 순결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부에서 후원 명칭 사용 승인을 해 달라고 했다.
성적자기결정권, 양성평등을 내세우는 우리 부서에서 후원하거나 지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종교단체는 매년 해 오던 일이었다고 교육부 출입 언론사를 통해 압박했다.
후원을 승인한다는 건 우리 부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어서 버티고 버티어서 결국 후원 승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도교육청이 좀 곤란해졌다.
시도교육청과 학교장이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떠 넘겼다.
지금 생각해도 교육부가 좀 미안하고 치사했다.

지금도 업데이트를 해 가며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잊혔는지 모르지만,
유, 초, 중, 고별 성교육 지침서 ‘함께 풀어가는 성 이야기’ 만들어서 보급했다.
(내용은 연구자들이 했고, 책 이름은 내가 지었다.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지낸다.)
10시간 내외의 재량시간을 확보해서 성교육하도록 했는데, 중고등 지침서에 피임교육도 들어 있었다.
몇몇 단체에서 난리였다.
중고 여학생에게 피임교육을 하는 건, 마음대로 섹스를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금은 어이없는 주장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먹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건 어찌 보면 자살행위였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성이 그 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다.
성경험에 대한 조사를 보면 시기도 빨라졌고, 비율도 높아졌다.
당연하다거나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역시 나는 꼰대다.)
그럼에도 두 딸의 아빠인 나는, 그때 배운 성적자기결정권을 지지한다.
딸들은 그랬으면 좋겠다.
남자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고 좋아해서라고 결정했으면 하는 거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디 그게 맘대로 되겠나 싶다.
사랑하고 좋아한다는데...
도리가 없지 싶다.

그래도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현재도, 혹시 모를 나중도 생각하는.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도 그것 빼고 나면 빈껍데기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껌씹어 먹는 놈 이야기가 요즘 화제다.
그냥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할 줄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히 ‘함께 풀어가기’로 했는데...



<꼰대 생각>은 중년의 사소한 상념과 일상 이야기입니다. 꼰대인 줄 알지만 꼰대이고 싶지 않은 바람입니다.
<책의 이끌림, 2017>, <뇌가 섹시한 중년, 2019>를 출간하였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꼰대 생각 07_신종 상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