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상에 올라온 갈치 구이가 맛이 별로다.
갈치를 먹고 싶다는 내 말에, 방콕 맘 카페에서 정보를 얻고 어렵게 마트에서 사 온 갈치인데.
“나는 외국에 나와 있어서 향수에 잘 젖지 않는데 요즘은 좀 이상해.”
“...”
“비 오는 날 산사에 가고 싶고, 눈 오는 날 산에도 가고 싶어 지네, 갈치구이 먹으러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한국이 그리워.”
그러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20대나 서른 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고 싶어?”
“아니.”
“왜, 다른 남자 만나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 안 들어?”
“그놈이 그놈인데 뭐~”
“뭐? 내가 그냥 그놈 중에 하나야?”
갑자기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이유는, 모른다.
서른 즈음에 나는 두 살, 세 살박이 두 딸의 아빠였다.
세 살 큰 애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두 살 작은 애는 이웃집에 맡기며 키웠다.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멀어서 아침마다 큰 애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건 내 몫이었다.
어린이집 앞에서 두 달이나 울었다, 아빠랑 떨어지기 싫다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빠~, 아빠~’하며 우는 아이는 처음 본다고 했다.
그다음 해에 작은 애도 어린이집에 보냈다.
5층 주공아파트의 5층에 살았다.
복사열 때문에 여름에는 참 덥고, 겨울에는 무척이나 추웠다.
보일러에 들어가는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주유소에 가서 직접 기름을 사서 5층까지 직접 옮기기도 했다.
학교 마치고 늦은 시각까지 학교 숙직실에서 선생님들이랑 카드를 자주 했다.
젊은 남자 교사들이 많아 놀거리가 많았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좁은 거실에 아내가 자고 있었다.
양쪽 팔에 아이 하나씩 팔 배게를 한 채.
IMF가 왔다.
32평 1층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이자율이 18.5%까지 올랐다.
좀 더 낮은 이율로 대출을 받으려고 이리저리 은행을 뛰어다녔다.
금 모으기 운동을 한다고 해서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 돌반지, 아내의 반지도 내다 팔았다.
겨우 겨우 버티며 입주한 아파트에는 서울로 가며 1년도 채 살지 못했다.
결혼 4년 차의 신혼, 두 아이의 아빠, 큰 도심의 학교에 근무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
열정은 있었으나 명확한 목표나 꿈은 희미했다.
달콤한 신혼은 아이들에 묻혀 짧아졌고,
내 집 마련의 꿈은 IMF로 휘청거렸다.
아내는 학교와 집에서 지쳐갔고, 나는 친구와 선배를 좋아했다.
웃고 싸우고, 서툴어 실수하고, 힘겨웠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잘할 수 있을까?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 <서른 즈음에, 김광석> -
오늘 김광석의 노래는 더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