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어제는 눈이 내렸는데, 오늘은 봄 햇살이 패딩 점퍼를 기어이 벗겨 낸다. 낮기온이 18도를 넘었다. 주말에는 20도를 넘어간다니 봄이 성큼 다가왔다. 금강변 갈대는 여전히 갈색 코트 차림인데, 도로가 낮은 풀숲에는 초록의 봄이 움트고 있다. 곧 봄의 축제가 여기저기서 벌어질 터, 이 좋은 봄에 꽃가루 알레르기라니...
꽃가루 날리는 봄을 대비해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8층 엘리베이터 타고 문이 닫으려는데 서너 살 꼬마애가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잡았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다녀오는 모양이다. 닫히려는 문을 안에서 잡았고,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는데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꼬마 숙녀가 쭈삣거리더니 엄마 다리 뒤쪽으로 슬며시 숨는다. "무서워서 그래?" 엄마가 한마디 한다. '여기서 무서울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웃으며 인사 건넨 나는 졸지에 무서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가 무서운 사람 같이 보여요?' 한마디 하고 싶지만 참는다. 내 얼굴이 나도 무서울 때가 가끔 있고, 젊은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해 봐야 꼰대 소리나 듣기 십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1층까지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든다. 아이는 안녕이던 감사던 인사를 할 줄 모르고, 엄마도 무관심이다. 낯선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니 가까이 가지말고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칠 게 뻔하다. 요즘 세상이 그러하니 스마트폰만 열심히 보고 있는 이 젊은 엄마 탓을 하는 것도 무리다 싶다가도, 저런 가르팀을 받고 자란 아이가 학교에 가면, 어른이 되면 어쩌나 싶다. 아이가 무슨 죄인가, 모두 어른 탓이다.
대학 교수라는 부모가 가짜 표창장을 만들어 자식 대학 입시 써도록 했는데도 그 부모나 자식이나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군인을 동원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국제적으로 나라 망신을 시켜 구속이 되었다가 절차상의 문제로 잠시 풀려 났는데도 어퍼컷을 날리며 당당하다. 자기가 몇 년을 부린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고, 세금으로 과일 사 먹고 초밥 사 먹고도 그런 일이 없다고 우긴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의 기억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려 해도 그런 사람들이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러려니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하 수상한 것은, 그런 이들을 좋아라 손뼉 치며 환호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저토록 많은 걸 보니, 아무래도 내 생각이 어딘가 잘못되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도와준 사람에게 굳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모르고, 낯선 사람은 모두 무서운 사람이니 조심하는 아이들이 자라서 나랏일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받으며 살 터인데, 참으로 가당찮은 걱정을 한다. 봄이 오는 소리에 지레 겁먹고 병원 가서 독한 주사를 맞은 탓이다. 그나저나 빼앗긴 내 마음에는 봄이 언제 오려나?
#책의이끌림
#뇌가섹시한중년
#산티아고내생애가잘아름다운33일
#아카로스터_입맛까다로운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