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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꼰대 생각

꼰대 생각 21_꼰대도 가끔은 외롭다

by 배정철

‘외로움은 우리를 서서히 죽게 하는 반면, 관계는 우리를 소생시킨다’

최근에 읽은 <친밀한 타인들>이라는 책에서 본 문장이다.

죽을 상을 하고 혼자 외로움 떨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든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누가 그걸 모르나? 아는 것을 실천으로 연결하는 것 또 다른 문제다.

고독은 피하고 외로움은 즐기라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시끌벅적한 만남을 가능한 피하면서 혼자임을 즐기는 적극적인 외로움도 있고,

사회적 위치, 직장 문제, 가족의 형편에 따라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항상 즐거우신 것 같아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쾌활한 성격이신가 봐요.”

“농담도 잘하시고, 성격이 아주 좋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평가가 다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다 맞다고 할 수도 없다.

나를 아는 사람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수시로, 때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직장에서 회식을 할 때다.

초반에는 인사말을 하라는 둥, 건배사를 하라는 둥 하면서 가운데 자리에 관심을 준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될까?

잠시 이야기의 주도권을 놓치면 모세 바닷길 갈라지듯 나를 두고 좌우로 모임이 갈라진다.

술도 한 잔씩 돌고, 분위기도 달아오르고, 목소리는 커진다.

그럴수록 가운데 자리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다.

그때 불쑥 찾아오는 적응 안 되는 그 느낌, 겪어 본 사람은 다 안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시기라 내 딴에는 공부 좀 도와주면서 딸들에게 아빠 노릇 좀 해 보려는 시도를 했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리며 수학 문제를 같이 풀어 본다.

아빠 해 본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이런 건 자살골에 가깝다.

오늘은 화 안 내고 부드럽게 해야지 하는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슬슬 열을 받기 시작한다.

이해 못하는 걸 잘 설명해 주기로 했는데, '이런 것도 몰라? 학교에서 도대체 뭘 한 거야?'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도 커진다.

그에 비례해서 집안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해진다.

괜스레 분란을 만들어서 아이들 시험까지 망치게 되었다고 아내도 타박이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는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이럴 땐 또 저녁 술 약속도 잘 없다.

집에 일찍 들어가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텔레비전 소리도 줄인 채, 혼자 거실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오는 그 느낌, 아빠들은 안다.


어디 그때뿐인가?

차가 막힌 도로에서 차 안에 혼자 있을 때,

가족 없이 혼자 저녁을 해결할 때,

무언가를 혼자서 결정해야 할 때,

그리고 힘들고 지친 하루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줄 이가 없을 때 외로움은 찾아온다.

어디 그때뿐인가?

주말 오후 말린 빨래를 걷다 바라본 저녁 해가 붉게 물들며 건물 너머로 넘어갈 때,

감기약 먹고 누워서 내 이마에 올린 내 손에 낯선 열기가 전해올 때,

갑자기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도 있다.

외로움은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나는 여기서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물음을 무책임하게 내 앞에 툭 던져 놓는다.


내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이 그 낱낱이 따로 오는 것인지,

그것들이 모여 총체적으로 찾아오는 것인지,

어떤 근원적인 이유와 근거를 갖고 오는 것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 각각의 외로움의 크기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언제 어느 때 닥쳐올지도 조차 모르니, 마냥 속수무책이다.

그저 속절없이 밀려오는 외로움이 내 코 앞에 닥쳤을 때, 아니 그것이 가슴께까지 도착하고 말았을 때에라야 겨우 알아먹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랜 세월, 많이 겪어봐서 그런지 그것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오래 남지는 않는 모양이다.

조금 아파하고 나면 또 씩씩해진다.

아니, 꼰대들은 그럴 때도 씩씩한 척해야 한다.

그래야 꼰대 아니겠나.


<꼰대 생각>은 중년의 사소한 상념과 일상 이야기입니다. 꼰대인 줄 알지만 꼰대이고 싶지 않은 바람입니다.
<책의 이끌림, 2017>, <뇌가 섹시한 중년, 2019>를 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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