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영 교수가 1년에 2권씩 옮겨발간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다. 지금 10권을 읽고 있으니, 완독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프루스트 책에는 내 지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깊은 사고와 철학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생각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세계가 지면 위로 올라와 나를 경탄케 한다. 인간이 이렇게 가치 있고 비싼 존재 임을 느끼고 있다. 그는 미로처럼 숨겨진 깊은 심연 속으로 두레박을 내려서 보석을 건져 올리고 있다. 한 팔 길이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가슴속, 어디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던 것인가? 신비의 천국이 푸르스트 글 항아리 속에서 마법처럼 걸어서 나온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지적 유희다.
그를 만나면 거스름 없는 즐거움이 솟아 나온다. 내가 그를 읽고 이해하고 알아서가 아니다. 내 지성은 그를 누릴 수 없어 어두움을 한참 걸어 다닌다. 그러다가 잠시 비춰주는 작은 빛살에도 내 정신은 깜짝 놀라며 반응한다. 이제 프루스트를 알아가는 것이 내 시간 여행 주요 일정이 되고 있다. 그래, 인생이란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지. 환갑 맞은 벌거숭이 장돌뱅이 같은 사람이 150년전 인생 천재와 같이 함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는 그렇게 멋진 올림 바(F#)를 연주했다오.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가슴이 조이는 것 같아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아야 했소. 청중은 격한 감동에 사로 잡혔다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권 166쪽)
그는 프랑스 귀족 살롱으로 나를 초대했다. 화려와 허세가 겸양의 언어로 반투명 포장된 그들의 놀이터. 그들 세상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흥미롭다. 여태껏 프랑스 살롱이 내게 관심을 끈 적이 없고, 가식의 놀음으로 폄하되었지만, 오늘은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지 못하는 풍요를 보았다. 살롱은 정신의 풍요를 마음껏 발산하는 시공간이었다. 철학과 문학, 정치와 예술이 무대에 오르고, 섞이고 반죽되면서 정신이 깨어나고 부유하게 했다. 의식의 표면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살롱은 그들 삶의 중심이며, 생기와 희망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깊은 지성들이 만드는 폭넓은 취향의 공유지였다.
오늘 그들이 나누는 음악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음악이 운율을 떠나 삶에 짙게 안착하고 있었다. 올림 바(F#)에 감동하고 그것이 가슴을 조여 눈물을 만들고, 마른 바닥에서 라르고가 개화하고, 피날레는 큰 만족으로 더없이 경쾌하다. 연주자의 영감에 악기 조차 기쁨으로 부풀어 온다. 도대체 이런 감동을 느끼는 자가 누군가? 전문 음악가 조차 누릴 수 없는 환희를 프랑스 사롱은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음악의 선율을 타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 연주자의 예술을 통해 자기 속에 감추인 수백 개의 우주를 보는 사람,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부럽다. 그들의 느낌이 너무 부럽다. 그들 정신의 풍요가 너무 부럽다. 흘러넘치는 여유와 넉넉함이 너무 좋다. 150년 전 그들 마음 공간을 가지고 싶다.
오늘 우리는 21세기를 산다. 인공지능과 생명 복제가 눈앞에 있다. 볼 것 많고, 너무 편하고, 원하는 것이 손에 잡힌다. 조명 조차 어두운 프랑스 살롱의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넓은 세상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파를 타고 내 귓속까지 연결되는 세상. 한정된 종이 소식이 소문을 만들고 한참 뒤에 사람들의 이야기에 회자되는 시대가 아니다. 옛날 사람이 가지지 못한 유일한 병기, 과학으로 무장한 시대를 사는 우리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난하고 부족한가?
별을 본다. 주변의 모든 불을 꺼야 한다. 아니 조명 없는 사막으로, 어두움만 존재하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음을 본다. 조용하고 잔잔해야 한다. 볼 것이 없어야 내면은 보인다. 작은 미로로 길게 꼬인 마음 밭을 걷는 것은 너무 어렵다. 길을 찾는 것조차 힘들다. 풍요를 거두는 것은 마음 밭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건강한 햇빛을 쬐어 싹이 자랄 때 가능하다. 수렵채집 삶 이후 농경으로 정주한 사람들, 그들은 마음의 길에 몰두하며 걸어왔다. 볼 것도 많지 않아, 신비한 마음 세계를 몰두하며 여가를 즐겼을 것이다. 프랑스 살롱, 그것은 그 시절 최고의 유희였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본다. 볼 것이 너무 많다. 흑백이 아니고 화려한 동영상이다. 빛이 너무 밝아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공간의 제약도 없고 모든 것이 연결된다. 어두움이 빛에 가렸다.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꿀 수도 키울 수도 없다. 과학기술이 만드는 풍요의 시대에 더 깊이 스며드는 어두움. 세상과 우주는 더없이 밝지만 내 정신은 한없이 어두워 간다.
촛불을 밝히자. 주위를 어둡게 만들자. 소란스러운 풍요를 걷어내자. 그리고 마음 여행을 떠나자. 빛이 없고 가난해서 오히려 내면이 넉넉했던 세상으로 가는 타임 머시인을 타고 가자. 조용한 여행을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