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주머니

by 동이화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날의 방황과 혼돈은 가라앉았다. 외로움을 외치는 아우성도 이제 거의 없다. 멀리 떠나 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마음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 나와서 세상을 유랑하던 우리 조상을 그는 그대로 닮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숙명이 유전자를 통해 오늘을 살고 있다. 과거 원시인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들과 우주여행을 시도하는 오늘의 사람이 어찌 이리도 똑같을까? 여기 이곳을 머물 수 없어 값비싼 기구를 타고 세상을 떠 돌다 급기야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오르고 있다. 영국의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선이 음속 이상의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우주여행을 했다고 난리지만 내게는 자랑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주하지 못하는 끝없는 유목, 그것일 뿐이다. 과연 여행 이란 게 무엇일까? 여기에서도 머물지 못하는 자가 세상 어디를 돌아다니는가? 가시와 엉겅퀴를 내며 유랑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삶, 그것은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최고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기도 하고, 상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아파하는 듯 하지만, 그리고 타인의 즐거움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 들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남의 일이고, 나와는 관계없고 나의 삶에 단 1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모두 알지만, 내 속이 터질 것 같아, 내가 죽을 것 같아, 자랑하고 싶고 나를 크게 보이고 싶어 그것 들어내며 상대에게 들어 달라고, 칭찬하고 위로해 달라고 끝없이 요구한다. 아! 얼마나 대단한 아이러니 인가? 지독한 패러독스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크고 소중해서, 타인을 결코 이해하고 공유할 수 없는 인간에게, 나의 자랑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최고인 것처럼 여겨 달라고 외치는 이상한 행동. 여기가 바로 내가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틀어질 수밖에 없다. 꼬이고 왜곡되고 혼돈으로 빠진다. 정상적인 관계는 없다. 에덴에서 쫓겨나 낙원을 잃어버린, 실낙원의 인간에게는 평화가 없다. 본향에서 즐기고 느꼈던 행복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그것 찾아 애쓰지만, 여기 엉겅퀴 가득한 이 땅에서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 난 것 같다. 믿음이란 것을 만들어 냈다. 공허로 텅 빈 가슴 메꿀 수 있는 유일한 질료는 무엇인가? 돈으로도 안되고, 권력, 명예로 안되고, 사랑으로도 안되고. 사람과 사람이 얽혀 있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그것, 그러나 우리의 본향에서는 언제나 가득했던 그것. 그것을 어떻게 찾아올 수 있을까? 그것이 무척 그립다. 그것을 꼭 되찾고 싶다. 그것을 미치도록 갖고 싶다. 그것은 그의 최고 갈망이다. 평화, 안식, 자유, 쉼. 사람으로 득실 거리는 이곳에서 렌턴 들고 그것 아무리 찾아보고 뛰어다녀 봐야 헛수고다. 여태껏 그렇게 많이 해 보지 않았던가?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시도하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아프고 상처 받았다. 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렇게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낙원을 우리가 잃어버렸을 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거기에서 쫓겨날 때 우리는 다 잃어버렸다. 마음을 채우고 감격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귀한 것들을 다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척 힘들다. 외롭고 불행하고, 머물 수 없고 떠나기를 소원한다. 갈 곳도 없고, 가 봐야 여기와 똑같은 그곳을 허망하게 갈망한다.


관계라는 길고 질긴 노끈 줄은 여기 이 세상 사는 우리를 촘촘하게 옭아맨다. 어떤 때는 그 동아줄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생각하여 행복이라는 늪에 빠지기도 한다. 또 어느 때는 조여 오는 질긴 그 줄 때문에 숨 막히고 질식해 버린다. 스스로 완전하고 대단하다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지만, 뻥뚤린 가슴을 채울 길이 없다. 상대에 달려들어 나를 집중하고 관심 가져 달라 말하고 싶지만 그럴 사람이 없다. 가장 가깝다고 하는 곁에 있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아! 여기 이 세상에 머물 곳이 없다. 떠나고 싶다. 관계라는 촘촘한 그물망이 없는 해방의 공간에 있고 싶다. 거기는 도대체 어디인가? 내가 숨 쉬며 쉴 수 있는 거기는 어디인가? 낙원 잃은 이 불쌍한 존재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물을 찾아 희망 찾아 수없이 살피고 다녀 봤지만 나를 품을 그곳은 없다. 헤매고 다니다 다시 그 자리로 오니 더 깊은 목마름만 있을 뿐이다. 갈 곳이 없다. 불쌍한 한 인간이 쉴 곳이 없다.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올 때 인간은 어쩌면 자신 만만 했는지도 모른다. 낙원 잃은 슬픔도 없었다. 가시와 엉겅퀴 가득한 땅을 파내며 농경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도 몰랐다. 식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들이며 한 곳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도 몰랐다.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를 알고 부끄러움과 싸움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걱정 없이 걸어 들어가던 인간의 모습. 하나님은 이 가련한 인간이 얼마나 불쌍했을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오만으로 가득한 인간을 그분은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그래서 낙원 잃고 떠나는 아담의 뒷 주머니에 무언가를 꾹 찔러 주셨다. 그것이 무엇 인지도 모를 인간에게 새로운 숨을 쉴 수 있는 주머니를 꼽아 주셨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번 맞추어 보시게. 이 정글 같은 지옥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돛단배 타고 리쳐드라는 사나운 맹수 호랑이를 태우고 태평양을 건넜던 파이는 어떻게 살아남아 미국 서쪽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던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곳, 이 세상의 지도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있을 수도 없고 표시도 없는 그 섬, 이성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그곳. 배상 관계 때문에 심문했던 선주 변호사는 결코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 그곳은 믿음이라는 이름 없는 섬이지.


그래. 믿음이란 주머니에 우리 슬픔을 집어넣자. 우리 기쁨도 자랑도 거기 집어넣자. 텅 빈 가슴에 밀려드는 외로움도 거기 집어넣어 버리자. 속에서 끓어오르며 불타는 분노도 여기 주머니에 집어넣자. 세상 일이 너무 무거워 들고 갈 수 없는 짐 덩어리도 거기 집어넣자.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거추장 거리는 것, 나를 감싸며 옥죄는 노끈들도 잘라 풀어 여기 이 주머니에 넣어 버리자. 내일의 걱정도, 희망도, 기대도, 내속에서 끝도 없이 일어나고 가라 않는 기분과 감정까지도 거기에 넣어 버리자. 당신, 보이는가? 온갖 것들이 들어가 산더미처럼 부풀어 버린 믿음이라는 주머니가.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그리고 내가 아니면 지고 갈 수 없는 저 무더기들이 꿈틀 거리는 저 대단한 주머니가 보이는가? 그래 비좁은 이 마음 공간에서 저렇게도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커져 나가고, 독기를 품어 가며 나를 아프고 상하게 했지. 에덴을 떠나는 아담의 뒷주머니에 찔러준 저 주머니는 저렇게도 플렉시블 하지. 저렇게 많이 담아 저렇게 커져 버렸으니. 그런데 더 신기한 것 당신 아는가? 우리가 한 날을 보내고 잠들어 죽어 있을 때, 저 큰 주머니는 텅 비어 다시 내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가 있지. 그리고 아침이 되고 나를 짓누르는 고통과 걱정, 근심과 세상의 짐들이 내 속에서 커져 나가서 견딜 수 없을 때, 그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공간을 또 만들어 내지. 그래 또다시 그 주머니에 집어넣는 거야. 내가 견딜 수 없는 세상의 큰 무거운 짐들을 말이야. 내일도 이 일은 계속되겠지. 아니, 계속되어야 해. 아니면 살 수가 없어. 낙원 잃어버린 인간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담을 주머니는 이 세상에 없어. 하나님이 뒷주머니에 찔러 주신 믿음 보자기 아니면 우린 살 수가 없어.


그래. 우리 착각하지 말자. 내가 우상처럼 받드는 사랑, 아내, 딸들이 내 문제 가져갈 수가 없어. 내 소리 들어 달라고, 나를 보아 달라고 외쳐도 소용없어.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먼저야. 날 봐 달라고, 내 생각 공감해 달라고, 그건 허튼 오해야. 모든 것 좋을 때 듣기 좋은 이야기 일 뿐이야. 너 그것 알아야 해. 네 마음 깊숙이 있는 것, 절대 끄집어 내 보이고 주면 안 돼. 그건 바보들이 하는 짓이야. 순수하고 착해서 네가 하는 것도 아니야. 그것을 받아 주고 품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그래서 세상은 어렵고 괴롭고 비정한 곳이야. 믿음 주머니가 아니면 안 돼.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어딘지 아니? 믿음 주머니로 내 속에 가득 담긴 오물 들을 쏟아 버리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그것 보여서도 안돼. 조용한 아침에, 아무도 보지 않는 비밀의 장소에 들어가 오늘도 믿음 주머니를 여는 거야. 그리고 담는 거지. 내일 또다시 비어 있을 그 주머니에 내일의 문제들을 또다시 집어넣는 거야.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거야.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믿음 보자기를 품고 남아있는
시간 속으로 뛰어갈 거야.
그것 없이는 안돼.
살 수가 없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은 바로 믿음 주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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