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집에 돌아왔다. 뜨거운 여름이 만들어 내던 긴 하루는 어느 틈엔가 짧아져 있었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내려앉던 어둠이 이제는 서둘러 자기 자리를 튼다. 여름의 싱그러운 녹음도 벌써 빛이 바랬다. 그렇게 목 놓아 울던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무에 매달린 잎들은 벌써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차가움이 어느 틈엔가 가까이 왔다. 가을이라는 상이한 공기가 자리 바꿈을 시작한 것이다. 시간은 머물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고 다르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계절을 느끼며 산다.
그는 아침 길을 떠날 때 와는 사뭇 다른 정취에 놀랐다. 하루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를 이렇게 크게 느낀 적은 별로 없다. 멀리 있어 손에 잡히지도 않을 것 같던 시간은 미래라는 어느 공간에서 살다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통과해 이제 과거라고 불리는 저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공간에는 여러 종류의 강한 자기장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빠른 유체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떠 밀리지 않기 위해 겨우 겨우 일어나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지 모른다. 기상청에서 제공하는 바람의 궤적 등고선 (Trajectory)과 같은 시간의 궤적선이 우리를 감 싸돌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바람의 소용돌이에 우리가 빠져 있다면 우리는 서 있을 수 없고 떠 밀려간다. 그런데 시간의 소용돌이는 압력을 동반하지 않는다. 소리도 없다. 우리가 느낄 수도 없다. 멀리 지나간 시간의 행적을 보고서야 세월의 흐름을 인지 하는 것이다. 미래에서 날아드는 엄청난 바람을 맞아 과거라는 곳으로 떠밀려 가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래도 시간을 놓치지 않고 과거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은 얼마나 가련한가?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만 그래도 다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는 10년 전에 쓴 그의 시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미래에서 불어오는 시간을 맞아 치열하게 대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건,
끝없이 수면 만들고 부서지는
바다 파도 물결과 같다.
바람과 폭풍우 그리고 기압의 다름.
그것들에 이리저리 휘몰리고
때로는 모든 것 덮는 광포의 소용돌이도 몰아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바다 표면 잘게 부수고,
수많은 물 입자 만들어
표면적 몇 배 크게 만들고,
깊은 바다까지 휘저어 놓아
그곳으로 공기 빛 파고들어
생명 넘치게 한다.
김수영 시인 말대로,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만
세게 불어오면 무릎 아래까지 굽어지고
더 세게 불어오면 발목 밑까지 굽어지고
바닥에 누워 버리기도 하지만
거기서 다시 힘과 의지 되찾아
생명은 다시 일어선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만
자연의 거친 저항 몸소 체득한
생명은 더 강해져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만.
그는 오늘 새벽에 집을 나섰다. 마린시티 해변로를 거쳐 동백섬을 돌아 해운대 미포로 갔다. 옛 동해남부선을 따라 청사포에 들러 추억을 노래했고, 송정 앞바다까지 그는 걸었다. 그의 발걸음 자국은 중력으로 인한 질량의 압력이 아니다. 그의 인생 속에 짙게 농축되고 배어버린 무게의 자국이다. 어떤 때는 납덩어리 같은 무게에 짓눌려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들어 가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날아다녔다. 그 모든 것들이 녹아들어 지금 60년의 발걸음을 만들어 냈다. 그 무게로 지금 자국을 내며 걷고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길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맞았던 지나간 시간들이다.
그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아마존 전자책 킨들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을 넘겨 보았다. 딸이 선물해 준 이 전자책이 얼마나 그를 행복하게 했던가? 5년이 넘게 그의 품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남은 인생의 저녁길에도 킨들은 항상 같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읽은 'The Great Gatsby'가 갑자기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영어 활자 속에서 지나간 기억 속에 담긴 손때 뭍은 감정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쳐다보고 있다.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 -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r arms fa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거기에 꿈이 있었다. 이상이 있었다. 초록빛이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희망이 있었다. 개츠비는 그 불빛을 믿었다. 그래서 푸른 잔디를 거너 먼길을 걸었다. 이제 손 만 뻗으면 그것이 잡힐 수 있다. 환상적인 즐거움이 바로 저기에 있다. 그런데 거기를 갈 수 없었다. 올해 그리고 내년, 시간은 미래에서 내려와 지금을 거쳐 과거로 들어가는 것이다. 희망은 저기 미래에 머물러 있는데, 그 미래는 이미 여기에 머무르다 과거로 도망쳐 버렸다. 희망봉과의 긴 간극. 그러나 개츠비는 실망하지 않았다.
내일 난 저기를 향해 더 빨리 뛸 거야. 그리고 내 팔을 더 멀리 뻗을 거야. 그럼 어느 멋진 아침이 찾아올 거야. 그러므로 우리는 조류를 거스리는 배처럼, 과거로 끊임없이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것이야.
그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 남은 시간들.
그것이 얼마가 될지는 모른다.
작게는 10년, 많으면 30년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내어 보면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개츠비처럼 살고 싶다.
어제의 꿈이 오늘 사라져 버려도
또다시 내일을 향해 더 빨리 달릴 거야.
그리고 더 멀리 손을 뻗을 거야.
그러면 멋진 아침이 찾아올 거야.
우리는 조류를 거슬리며 나아가는 배 일지도 몰라. 과거로 끊임없이 떠 밀려가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희망을 향해 떠나가야 해. 머무르면 사는 것이 아니야. 정지하면 떠 밀려 저기로 떨어져 버리지. 그래. 그것이 위대한 것이야.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