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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가 터졌다

by 동이화니

오늘 3번째 실험을 마무리하는 순간, 유압 펌프가 터졌다. 고압으로 달구어진 누런 작동유가 찢어진 배관을 뚫고 솟구쳤다. 매캐한 냄새나는 오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700리터의 기름이 깨진 수도관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흘러나왔다. 오일 게이지 수위는 0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끝도 없는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실험은 성공할 것이라 기대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어제 실험도 성공적으로 마치지 않았던가? 오늘만 성공하면 된다.


아침부터 시작된 모든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상대로 결과가 좋았다. 성공의 확신이 드는 시간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미소가 입가에 머무는 순간이었다. 이제 실험을 마무리 하자 생각했다. 최종 상태를 살피기 위해 데이터로거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펌프실을 돌아가던 나는 아연 질색하고 말았다. 마치 끊어진 동맥에서 피가 솟구치듯이, 기름이 공중을 치고 올라왔다. 순간 나는 냉각수 배관이 터진 줄 알았다. 그동안 많이 터졌으니까. 아. 그런데 이번에는 기름이었다. 나는 폭격당한 전쟁터에서 처럼 소리 질렀다. "기계 꺼! 유압펌프 꺼! 메인 스위치 내려! " 순식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절망감이 온 육체를 지배했다. 찌그러진 얼굴 근육 사이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큰일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 정말 큰일 났다." 열심히 균열 체크하던 학생들, 컨트롤러, 데이터 수집 장치를 조정하던 학생들의 동공이 갑자기 무채색 빛으로 변하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오늘 아침 실험실 풍경이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 너무 피곤해 일찍 누웠지만 12시 조금 너머 눈 떠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기대와 걱정, 흥분이 서로 길게 다리를 꼬우고 뒤엉켜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고통을 절규로 뿜어 내던 밤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힘든 여정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장밋빛 색깔이 꿈 동네를 물들이며 어른 거렸다. "이제야 해 냈구나! 이제 됐어." 그런데 확인할 것이 있었다. 컨트롤 부재(기준 실험체)의 실험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이전에 했던 실험 결과는 이상해." 컨트롤 부재 실험 결과를 신뢰할 수 있을 때, 우리 보강 방식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밤이 새도록 실험과정은 머리를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우리 큰딸, ♤♤ 특파원 발표를 앞두고 설레며 떨리는 기대와, 어쩌면 안될 수 있다는 불안과 걱정이, 밤을 끝없이 맴돌며 힘들게 했다. 벌써 며칠째인가? 잠 못 드는 밤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라는 성경 말씀을 실감케 했다.


그날 아침, 큰딸에게서 온 환호의 터짐을 안고 지하철을 탔다.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지나간 것이 추억이 되고 10월의 만추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여름의 고통이 열매라는 과실로 영글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논리와 추론으로 가능성을 찾아 헤매던 지나간 시간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의 희망과 아빠의 끝도 없었던 시도가 결실을 맺는 그날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펌프가 터졌다.




사실 이번 연구는 단순한 실험이 아니다. 이 실험 결과는 실험 차원이 아니라 실무에 적용할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동안 10년을 훨씬 넘는 관련 연구 결실이 여기에서 맺힐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전 같으면 문제없이 수행될 실험이 가는 곳마다 지뢰가 터졌다.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안 되는 가능성이 표면으로 나타나는 경험을 하며, 나는 4개월 이상을 지나고 있다. 환갑 맞은 교수의 앞길을 넘어지게 만들고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는 이 이상한 문제들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짱돌 들인가? 사상 공단을 찾아 이 터진 유압 펌프를 다시 살릴 묘책을 강구하며 찾아다녔다.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다. ♤♤특파원 소식에 환호하는 즐거운 소란 속에서도, 나는 펑 터진 펌프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간 며칠간의 밤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펑 터져 버리니 오희려 안도가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소리쳤다.



그래 완전히 터진 것은 아니야. 희망과 가능성은 아직 터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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