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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May 17. 2023

나는 글더듬이입니다

정확히 29일 만에 글을 발행한다. 그 사이 브런치에서 ‘글 발행 안내' 알람도 받았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다이어리 To do list에 발행을 적어놓고는 그날 저녁 기어코 X표시를 하며 한숨을 내셨다. 작은 성공이 아니라 작은 실패를 나날이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에겐 지겹도록 작은 성공, 쌓이는 성취감 어쩌고 저쩌고 재미없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날마다 글쓰기에 애를 태웠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자 쓰지 말자, 쓸까? 쓰지 말까?, 쓸래 안 쓸래를 반복하다 어김없이 ‘내일 쓰지 뭐’로 끝나버리는 게임에 혼자 속을 끓였다. 다른 사람들은 척척 잘도 쓰던데, 에디터에게 픽도 당하고, 다음 메인에도 뜨고, 제안도 받고 진짜 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던데 난 뭐지? 찌질한 마음이 든다.


왜 쓰고 싶으면서도 쓰기가 어려울까? 자꾸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쓰고 싶다'와 '쓰고 싶지 않다'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잘 쓰고 싶다'와 '잘 쓰지 못할 바엔 차라리 쓰지 않겠다’ 사이에서 지레 포기하고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정용준 작가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라는 책을 읽었다. 말을 더듬는 14살 소년이 언어교정원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 좋은 어른, 또래와 연대하고, 말하기와 닮은 글쓰기를 하면서 처절하게 상처받고 닫혀있던 소년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며 치유되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아무튼 글쓰기도 마찬가지야.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다음 음도 나오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문장도 문장도 없지.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p.115


  

언어교정원에서 만난 소설가가 중간중간 말을 더듬어가며 소년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다.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다.. 이미 실패한 상태.. 예감이면서 확신.. 한참을 곱씹으며 단락에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글더듬이였구나.

잘 쓰지 못할 거라는 예감과 확신에  떠오르는 글감들을 생각 속에만 가둬두었다. 첫 음을 내뱉지 못하듯 첫 문장도 써내지 못했다. 제대로 쓰기 전엔 꺼내놓기 싫다는 생각이 깊어져 내 글은 한 달 전 열여섯 편에 머물러 있다.


더는 일기장에 쓰지 않는 이상 보라고 쓰는 글이건만 누가 볼까 겁이 났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음에도 실망시킬까 두려웠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내 글에 점수라도 매길까 부끄러웠다.  

좀 더 생각을 다듬고 써야지, 글쓰기 책을 더 많이 읽고 써야지, 멋진 문장을 잔뜩 수집하면 그때 잘 써봐야지, 내일 써야지, 다음 주에 써야지, 그러다 다음 달이 되고 말았다.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음도 나오지 않듯이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없는 것을. 저절로 잘 써지길 요행만 바랐나 보다.






책 속에서 만난 소년은 말하는 연습을 하고, 말로 내뱉지 못한 말은 노트에 적었다. 더듬거리려는 말의 앞을 부드럽게 늘이거나 비슷한 단어로 바꿔 말하면서 차츰 나아졌고, '너 진짜 말 잘한다'라는 얘기도 친구에게 듣게 된다. 소년의 성장과 변화를 숨죽여 지켜보던 내게도 전해지던 따스한 위로와 용기.


정용준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말더듬이가 다르게 여겨지지 않았고, 조금 더듬을 뿐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듯 나 같은 글더듬이도 좌절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실패할지 모른다는 예감에 가둬두었던 생각들을 일단 꺼내보자. 마음에 안 들면 소년처럼 비슷한 단어로 바꿔보기도 하고, 앞 뒤 순서에 변화를 주기도 하면서 요리조리 고쳐보면 되지 않을까. 말하기를 연습하듯 글쓰기도 그리하면 늘지 않을까.

일단 첫 문장을 꺼내고 내처 쓰기로 마음먹어본다.



비록 일기 마냥 이런 다짐글을 썼다 해도 앞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글쓰기 실력이 나아질지 장담할 수도 없다. 허나 평생 글더듬이로 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싶은 말과 담아둔 생각들을 쓰면서 살고 싶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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