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날 Jun 04. 2023

차조심 길조심 사람조심


동네 삼겹살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빼놓을 수 없어 편의점 쪽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도착했을 때쯤 눈에 훅 들어온 작은 반짝거림. 아파트 단지에서 길고양이를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따라 눈에 띄었다. 크림이(우리 집 냥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길고양이가 더 애잔해진 우리 모녀다. 아이와 눈빛 교환 후 나는 편의점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 츄르(고양이 간식)를 샀고, 냥이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는 딸한테 건넸다. 혹 놀랄까 싶어 나는 더 이상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켜보기로 했는데.


어디선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검은 봉지를 든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어쩐지 내 눈엔 미심쩍어 보이는 그가 아이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말까지 건네는 듯. 나는 보자마자 보호자 여기 있소 들으라는 듯 딸의 이름을 부르며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고양이 귀엽다, 츄르 잘 먹어?" 괜스레 딸에게 뻔한 말을 늘어놓으며 곁눈질로 남자의 동태를 살피니, 그는 동네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사람이었던 것. 그제야 화단 안쪽에 놓인 고양이 그릇이 보인다. 보통 캣맘하면 내 또래 아주머니, 동네 할머니들이 떠올랐던지라 갑작스러운 캣파파(?)의 등장이 훈훈하면서 낯설었다. 아저씨와는 입만 웃으며 어색한 몇 마디를 나누었고, 이내 그는 휘적휘적 가던 길을 갔다.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중년의 남자.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좋은 일 하시네. 하지만 길고양이한테 밥을 주는 사람이 무조건 다 좋은 사람은 아니야. 밥을 줄 뿐이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혹시 누가 저기 고양이 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알았지?"



따라오라 한 것도 아닌데, 생판 모르는, 그냥 고양이 밥 주는 선한 아저씨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며 이런 얘기를 해버렸다. 정작 딸아이는 자기 어린아이 아니라며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데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내게 예민하다고, 동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일단 경계심을 갖도록 일러주는 수밖에.




얼마 전 학원가는 10살 아이들에게 순대를 사준다며 유인한 50대 남성이 검거됐다는 뉴스를 보았다. 다행히 따라가지 않은 아이들이 학원 선생님께 알리면서 신고가 이루어졌고, 잡고 보니 성범죄 전력도 있는 전과 42범이었다.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어느 TV프로그램의 실험내용도 기억난다.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를 통해 인근에 성범죄자가 거주하는지 사진까지 조회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취지의 실험이었다. 실험대상 아이들에게 사진(실험을 위한 연기자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니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차분히 알려주었다. 다음날 하교하는 아이들에게 사진 속 남자가 접근해 팔을 다쳤다며 차량에 상자 싣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어젯밤 엄마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4명 중 3명이 아저씨를 도와주려 차에 타더라는. 얼굴이 헛갈리기도 하거니와 순수한 아이들이 어른의 도움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TV를 보던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실험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엄마는 안타까움과 놀란 마음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길에서 전과 42범을 마주칠 수도 있는 느닷없는 세상에, 어른의 도움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순수한 아이들이 살고 있다. 어디까지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나쁜 인간인지 헷갈리지만 아이가 마냥 순수해지지만은 않도록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경계와 신뢰를 동시에 알려줘야 하니 부모 노릇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쓰고 보니 조금 씁쓸한 감정이 들기도.


6학년 딸아이 담임선생님의 알림장 끝에는 항상 똑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차조심 길조심 사람조심”


사람조심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세상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남편은 담배를 피우십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