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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Dec 23. 2022

널 뛰는 마음

퇴직자 심경고백

이것은 평생직장이라 불리는 안락한 우물을 제 발로 벗어난 개구리 아니 40대 여성의 심경변화 보고서이다.

보고서라고 썼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그 어떤 과학적 근거도 논리도 없음을 밝혀둔다.     

보고서라 쓰고 그냥 사사로운 기록이라 읽으면 딱 맞겠다.          




1단계 여유로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여유로움이었다. 시시때때로 이렇게나 시간이 많다고? 당혹감이 몰려올 만큼 시간 부자가 되었다. 주말부부에 독박 육아를 하며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출퇴근을 반복하던 일상은 매일이 소란스러웠다. 아침을 챙겨 먹을 느긋함도, 저녁을 기다리는 설렘도 없었다.  

                  

퇴직 후 나의 시간엔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척척 알아서 등교 준비를 하는 딸아이는 아침밥만 챙겨주면 더 이상 손 갈게 없는 든든한 고학년 언니가 되어있었다. 아이 등교 후 한가롭고 우아하게 내려 마시는 모닝커피. 직장에서 공복을 달래고 정신을 깨우려 두 개씩 섞어 마시던 믹스커피와는 차원이 다르다.   

 


2단계 죄책감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고, 놀아 본 사람이 잘 논다고. 수능시험이 끝난 후 대학 입학도 하기 전부터 동네 칼국숫집 종업원으로 자진해서 뛰어들고. 그 후로도 다종다양한 알바를 섭렵, 내가 쓸 돈은 내가 번다 정신으로 살던 나. 작년 퇴직하기 전까지 그 정신을 계승하며 개미처럼 참 열심히도 일했다. 엄마들에겐 직장일 뿐만 아니라 육아에 살림까지 완전 원 플러스 원 아니던가.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의 여유로움 끝에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사지 멀쩡한 내가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나?' (사실 잘 놀 줄도 모르는 숙맥인데. 억울하다.)

그날따라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칠십은 다 되어 보이는 여사님이 빨간색 옷을 입고, 더 빨간 립스틱을 바른채 복도 물청소를 하고 계신다. 1층에선 육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경비아저씨가 바닥을 쓸며 반갑게 인사하신다. 내 사지가 너무 건강해 어찌할바를 모르겠다.



3단계 자괴감


국물이 새지 않게 음식물 쓰레기를 꾹 짜고 봉투 입구를 빙그르르 돌려 꼰다. 손과 코에 불쾌한 냄새가 남아있다. 고양이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아 모래 속에서 감자를 캔다. 가끔 맛동산이 나오기도.(집사들은 알 것이다. 똥에 모래가 이렇게 저렇게 묻어 뭉친 모양을) 아무리 귀여운 우리 집 막내라지만 구린 냄새까지 좋을 리 없다. 내가 이러려고 그럴싸해 보이는 내 직장을 그만두었나? 난데없이 자괴감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퇴직을 하기 전에도 늘 하던 일인데. 왜 갑자기 이런 낯선 마음이 드는 걸까.



4단계 맹렬함


맹렬하다 : 기세가 몹시 사납고 세차다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맹렬함,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맹렬함, 아이 교육에 뒤처지지 않는 엄마가 되겠다는 맹렬함, 살을 빼겠다는 맹렬함, 집안에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맹렬함, 집밥을 잘 해먹이겠다는 맹렬함. 모든 것이 맹렬했다.


이제 전업맘이 되어 시간 부자가 된 내가 오히려 새벽 기상을 시도하고, 직장인 보다 더 바쁜 척 타임테이블 다이어리에 시간 단위 계획을 적고, 지역 평생학습 프로그램, 도서관 행사, 학교 부모 수업, 유튜브 유료 강의 등 닥치는 대로 듣고 참여했다. 그만두길 잘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인지 매일 맹렬하게 나의 존재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으니 이내 지치고 마음이 반 토막이 나더라는.



5단계 평정심


무언가를 꼭 해내려는 맹렬한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 내 자리에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사람이 되고 있다. 거창한 일은 아니다. 여전히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고양이 똥을 치운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려고 공무원을 그만두었나 호기심과 질책의 눈초리는 변함없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갖고, 남편과 아이에게 정성을 쏟고, 하고 싶은 공부,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브런치 작가도 되었으니 성취감도 느끼는 중이다.



평정을 찾아 희망에 닿기 위해선
이미 벌어진 일에 속박되지 않고
감당할 줄 아는 담대함,
그리고 타인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
나의 일을 감당하고 남의 일을
염려하다 보면 반드시 평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내 안의 평정과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밝은 여백을
만나기를 바라며.

                                                   

                   허지웅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  중에서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한, 대충 생각해 봐도 17단계쯤 돼 보이는 심경 변화가 있었다. 행복감, 만족감, 뿌듯함, 찌질함, 조급함, 두려움 기타 등등. 짧게는 하루 때로는 며칠, 몇 주에 한 번씩 복잡다난한 생각이 널을 뛰었다. 그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 속에서 나의 시간은 천천히 너그럽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정시 출근하는 직장은 없지만 루틴은 있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으니 걱정 마시길.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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