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 작가의 신작, 소설집 『연수』를 읽었다. 역시 재미있다. 책에 실린 6편의 단편 모두 한 번은 마주쳤을 법한 현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 나도 이런 사람 직장에서 만난 적 있는데? 뭐 이런 느낌. 그러니 빠져 읽게 된다. 니 마음인 듯 내 마음인 듯 공감 가는 부분이 참 많다. 시트콤 같이 웃기다가도 어느 대목에선 씁쓸하고, 씁쓸해 쓴웃음을 짓다가도 어느새 위로받고. 장류진 작가의 글은 역시 잘 읽힌다.
책을 덮은 후 작가가 초대손님으로 나온 팟캐스트를 들었다. 어찌나 신나게 집필 뒷 이야기를 하던지 듣는 내내 유쾌하고 천상 이야기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일화 중 소설집에 실린 <라이딩 크루>라는 단편에 얽힌 에피소드가 특히 마음을 끌었다.
마침내, 우리 둘은 그야말로 '빤스 바람'이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제야 생각난 게 있었다. 내 팬티가 거의 투명에 가까운 얇은 여름용 팬티였다는 것을.
"뭐예요? 쿨팬티 입으신 거예요? 저는 순면이라 불리한데요, 팬티도 서로 벗으시죠. 공정하게."
장류진,『연수』<라이딩 크루>, 창비, 2023, p.222
저자는 '쿨팬티'라는 단어를 고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언젠가 홈쇼핑에서 본, 쇼호스트의 손이 훤히 비칠 정도의 얇고 시원한 팬티를 떠올리며 그것을 칭하는 용어를 쓰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란다. 그렇다고 여름팬티, 얇은 팬티, 인견팬티로는 쓰고 싶지 않았다고. 딱 맞는 단어를 찾기 위해 팬티검색을 엄청 했고, 결국 알고리즘이 죄다 속옷만 보여주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틈에 속옷을 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니 웃음이 났다.(하하)
그렇게 집요한 검색 끝에 찾아낸 쿨팬티.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는 장류진 작가.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서 팟캐스트를 듣던 나도 '쿨팬티 발견'의 기쁨이 느껴졌다. 마침내 문장에 단어를 채워놓고 '드디어 찾았다, 잘 썼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에 진행자 황정은 작가도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는 과정의 희열이 소설 쓰기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며 장류진 작가의 기쁨에 동조했다.
‘쿨팬티’라는 단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들으며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서운 녀석 알고리즘이 온갖 속옷을 눈앞에 펼쳐내는 장면이 떠올라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진지한 마음으로 듣고 생각했다. 내는 책마다 사랑을 받고, 잘 쓰고 잘 읽힌다는 작가도 단어 하나를 찾아내는 데 저리도 공을 들이는구나. 쉽게 떠오르는 여름팬티를 마다하고 더 맛깔스러운 단어를 찾아 저토록 파고드는구나. 그러고 나서야 잘 썼다 스스로 생각하고 만족하는구나.
장류진 작가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자신의 글이 잘 읽히니 쓸 때도 스르륵 쓸거라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고. 정작 자신은 바닷가에 돌집을 짓는 마음으로 글을 쓰며 돌이 안 나오거나, 나와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몹시 괴롭고 힘들다고. 땅을 파고, 돌을 찾고. 그 돌을 사포로 갈고 쪼개기도 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와르르 무너트리고. 그렇게 돌과 돌사이 빈틈에 딱 맞는 돌을 하나하나 찾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작가의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유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도 떠올랐다. 한예종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소설을 쓸 때만큼은 '짜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짜증이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감정이 뭉뚱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글로 쓸 때는 더 섬세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그것이 서운함인지, 슬픔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짜증' 뒤에 숨어있는 진짜 내면의 감정을 세분화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삼 작가의, 글 쓰는 이들의 노고에 경탄하며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동안 글에 어울리는, 살아있는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마침내 적확한 단어를 찾아낸 후 쾌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지.
『연수』에 대한 박준 시인 추천의 말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이야기의 결이 희한하게 곱다’
아.. 난 왜 이런 곱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책의 느낌을 내 글의 두 번째 문장에서처럼 고작 재미있단 말로 퉁치려 했을까.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과 사물을 뻔한 단어와 쉽게 떠오르는 용어로 두루뭉술 넘어갔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니 퉁치지 맙시다는 내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나면 얼마간은 고민하는 흉내라도 내겠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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