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by 생강




도망칠 곳이 하나 밖에 없을 때, 때로는 그곳도 지옥이 되더라. 믿을 게 하나뿐이면 그 하나가 날 배신하기도 하지.


내겐 도망쳐도 갈 곳이 많아. 나는 고요 속에 잠겨 있는 게 좋아. 닳도록 읽은 책을 또 읽는 것도 좋아. 사진첩을 오랫동안 보는 것도 좋아해.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전곡 재생해서 하루 종일 듣는 것도 좋아.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일기를 써 갈기는 것도 좋아하지. 너무 작은 일 같지. 그렇지만 나는 내 안식처를 구해 놓았다고 생각해.



너 도망칠 때 매번 한 곳으로만 가니?


난 여러 갈래 길에서 고민하다가 지금 내가 갈 수 있고 가고 싶은 길로 도망쳐.


이 작은 일들이 내겐 그래. 안식처이자 도망의 끝, 나의 보금자리.



어떤 날에는 책이 고파서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른 날엔 활자 자체가 보기 싫고 이해나 생각을 포기하고 싶어서 이불 속으로 도망쳤고, 또 어떤 날엔 가만히 생각에 잠겨 내 머릿속을 여행하기도 했지. 온 마음을 맡겼던 과거의 노래에 또다시 마음을 빼앗기고 싶어서 그 노래를 미친듯이 찾기도 하고.


나는 내 안식처가 참 소중해. 마음대로 흐물거려도 날 욕할 사람 하나 없는 그곳.



좋은 것들을 곁에 두고 싶다. 언제나 도망칠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