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18 - 버스 손잡이를 잡고 안전하게

눈이 내린 다음 날

by 생강

18.


눈이 온다. 지붕을 집어삼킬 만큼 눈이 팍팍 쏟아졌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들이 도로 위를 점령했다. 걷기 힘든 눈길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서 집으로 도달하는 사람들이 창문 틈새로 보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은 낭만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땅 위의 사람들이 견디는 광경은 한순간도 낭만이 아니었다. 위태롭고 처절했다. 나는 창밖 사람들의 귀가를 속으로 응원했다. 눈길에 자주 넘어졌던 내가 생각나서 그들이 단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기를 빌었다.


다음 날 눈길을 헤쳐 버스 정류장까지 갔을 때 나는 덜컥 눈이 무서워졌다. 2분 거리의 정류장까지 닿는 데도 이렇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되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어떡하지. 오늘 기온을 보니 눈이 녹기는커녕 내 귀가 얼어버릴 것 같은데. 베란다 문도 얼어서 환기도 못 시키는데 과연 위험에 빠지지 않고 조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귀갓길을 걱정하며 버스에 탔고 귀갓길보다 더 무서운 일을 맞닥뜨렸다.


버스 바닥에 녹다 만 눈이 늘어져 있었다. 모두의 신발에서 떨어진 먼지 색 눈이 버스 바닥을 덮었고 나는 기사님을 지나 자리로 향하면서 두세 번 미끄러졌다. 손잡이도 소용없었다. 휘청거리는 손잡이와 함께 몸도 휘청거렸고 나는 동아줄처럼 손잡이를 꼭 쥐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식도까지 올라왔다가 쇄골쯤에 멈춰서 둥둥둥 울렸다. 다음 정류장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한 채로 콧바람을 뿜었다. 나 방금 꼬리뼈 다칠 뻔했어. 이따가 어떻게 내리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류장에 버스가 잠시 멈추는 것을 기다렸다가 뒷자리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안정을 찾았을 때쯤, 다음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버스로 올라탔다. 눈길이 된 버스 바닥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밀려들었고 눈을 밟자마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살아야겠다는 눈빛으로 손잡이를 찾아 잡았다. 그들이 약간씩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타실 때는 더 긴장하며 그들을 지켜봤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르지만, 걱정했다. 넘어지지 않길 바랐다. 제발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손잡이를 잡길 바랐다.


모두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나는 목적지에 도달해 내릴 준비를 했다. 뒷문에 가까이 앉아서 내릴 때는 탈 때보다 수월했다. 버스 바닥보다 험난한 바깥 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아직 남아있는 승객들이 안전하게 모두의 목적지에 도달하길 바라면서.


모르는 사람들의 안전과 안녕을 걱정하는 날들이 늘어간다. 나와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들의 당황스러운 눈빛을 외면할 수 없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생각이 한 바퀴 돌면 이윽고 다른 사람도 타인인 나를 걱정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이, 걱정과 염려가, 용기 내서 괜찮은지 묻는 그 한 마디가 나와 타인을 살렸을 거라고 믿게 된다.


내일은 눈이 더 녹아서 어떤 길도 미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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