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33 - 밤이 되었습니다

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개를 들어주세요.

by 생강

33.


밤이 되었다.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암막 커튼으로 창을 반만 가렸다. 아침 햇빛이 방 안을 쏘아야 일어나기 쉽다. 밤에는 커튼을 늘어놓지 않아도 바깥으로부터 나를 숨길 수 있었다. 온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하루 중에 가장 좋은 순간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 사이, 다른 하나는 오후 11시 이후의 밤이다. 오전은 내가 가장 활기찬 시간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자신감으로 가득 찬 몸으로 활동한다. 그런 내가 늦은 오후를 넘기면 열정이 쪼그라든 사람이 되는데 밤이 오면 다시 맑아진다. 그것은 오전과 다른 맑음인데, 오전에는 몸이 맑다면 밤에는 마음이 맑다. 윗집의 소음도, 바깥의 공사 소리와 경적소리, 사람들의 말소리도 모두 사라져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밤 11시와 새벽 2시 사이에 나름대로 하고 싶던 일을 한다. 미뤄뒀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솔직한 일기를 쓰고 때로는 눈을 감고 초침 소리에만 의지한 채 명상을 한다. 한동안 집에 있으면서 나를 알게 되었는데, 나는 소음에 무척 취약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밤 11시는 그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고요라는 단어 없이 고요를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밤 11시를 말할 것이다.


요즘은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잠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하고 다짐해도 매번 2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감는다. 자기 전은 대부분 하루를 흘려보낸 것을 후회하는 시간이다. 후회하다가 후회하는 순간도 이미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끼며 다시 후회를 한다. 마음을 호되게 때려서 더 이상 후회할 거리도 없어지면 눈을 감는다. 가끔씩 바깥에서 차의 헤드라이트가 창을 뚫고 내 방 천장을 훑고 지나간다. 마치 방구석에 숨은 나를 찾아내겠다는, 탈옥한 죄수를 찾고야 말겠다는 날카로운 눈빛 같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자꾸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밤이 좋은 이유는 빛이 없어서인데 나는 빛이 없으면 기상할 수 없다. 모순이 날 죽이고 살리는 것 같다.


오늘,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마음이 불편하다. 자주 듣는 말인데 자주 듣고 싶지 않아서 지겹다고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지겹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지겨우니 그만 하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그렇지만 지겹다고 말하지 않으면 계속 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자주 하는 말에 상대방이 인상을 구기거나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말을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상대방을, 왜 나를 의심하지. 오늘 밤 11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윗집의 소음, 공사하는 소리,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를 쓰는 소리가 하루에 몇 번씩 내게 침투했다. 나는 피곤하다. 오늘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소리는 사람의 말소리였다.


침대 머리맡에 전등을 두었다. 무척 노래서 가로등 같다. 나는 고요한 밤에 나만 존재하는 나만의 오두막, 나의 이불속에서 책을 읽는다. 그 누구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럴 수 있으며 아무도 내게 욕하지 않는 곳에 있다.


밤 11시부터 새벽 2시에는 숨을 자연스럽게 쉬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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