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을 땐 공원을 가지
34.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우린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인원은 조곤조곤 말하고 서로의 사정을 과격하게 들추지 않는 모임에 소속돼있다. 한 친구는 자주 보아도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었고 다른 친구는 자주 보지 않아서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우리 셋은 나의 집 근처에서 우동과 덮밥을 먹고 따뜻한 날씨에 취해 길 막바지까지 걷다가 약국에 들려 여드름 치료에 좋다던 약을 샀다. 우리 이제 어디 갈까. 누군가 물었고, 어린이 대공원으로 가자. 커피 하나 사 들고 공원에 있자. 누군가 대답했다. 그럴까. 그럼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자. 그래. 모두가 대답했다.
지하철 안은 덥고 아늑했다. 양 옆에 앉은 사람들의 외투가 내 팔을 침범했다. 핸드폰을 들 수가 없어 결국 눈을 감고 어린이 대공원 역까지 몽롱하게 실려 갔다. 바깥에 추울까. 더울 거 같은데. 바람이 찬데. 지퍼 올려야겠다. 우리는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출구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자 어린이 대공원 정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궁 같네. 경복궁도 가고 싶다. 다음에 가자. 야, 날씨 좋다. 기분이 좋아졌어. 예상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다. 도리어 조용했고 새소리와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나는 앞서 가는 두 사람과 정문의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대공원을 한 바퀴 크게 훑었을 무렵, 발이 아파왔다. 목마르다. 응, 카페로 갈까? 한 번 찾아볼게. 우리는 다시 정문으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낮은 벽돌담에 잠시 앉았다. 햇빛으로 노곤함을 적시다가 바람이 불면 옷을 여몄다. 건너편 건물에 카페 있네, 우리 저기로 갈까. 그 한 마디에 군말 없이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넜고 가기로 한 카페보다 가까이에 있는 카페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들어갔다.
커피 들고 다시 공원으로 들어가자. 높은 나무 계단 있더라. 거기에 앉아있자.
카페 내부에 한산하고 눅눅한 기운이 돌았다. 손님은 적었고 모두 고요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직원은 한 명뿐이었고 무인 기계로 주문을 받는 구조였다. 나는 밀크티를 시키고 직원에게 재빠르게 달려가 텀블러를 내밀었다. 저 방금 주문한 사람인데, 혹시 여기에 넣어주실 수 있나요? 내 말에 잠시 당황한 직원은 네,라고 말했고 나는 친구들이 주문을 끝마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두 사람은 각자 레모네이드와 캐러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어디선가 짧은 벨 소리가 들렸다. 음료를 가져가는 곳에서 직원이 내게 눈짓을 했다. 그는 내게 받은 텀블러를 양손으로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왜 그런가 싶어서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고 그는 미안한 표정을 한 채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가 열심히 담아보려고 했는데 텀블러가 조금 작아서 우유를 다 못 넣었어요. 그래서 더 달 거예요.
그 말을 하려고 내 텀블러를 꼭 쥐고 있었구나. 나는 괜찮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과 카페를 나섰다. 열심히 해봤는데 잘 안 됐구나, 하는 마음에 텀블러를 열어봤다. 텀블러에 밀크티가 아주 가득 차 있었다. 한 입 마시지 않으면 액체가 찰랑거리다가 넘치겠다 싶어서 급하게 한 입을 마셨다. 매우 달고 맛있었다.
대공원으로 향하기 전, 지하철 역 화장실을 들렸었다. 왠지 배가 아프더라니. 친구들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을 나를 걱정했고 나는 지난달보다 생리통이 없어서 괜찮다고 말했다. 언제 아플지 몰라서 불안했지만 진통제를 항상 가지고 다녔으므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 게 먹고 싶긴 한데.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작은 텀블러를 갖고 나와서 다행이다. 더 달고 진한 밀크티를 마시게 됐어. 운이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과 공원 안 쪽의 나무 계단에 앉았다. 햇빛에 서서히 녹는 몸, 아려오는 발바닥, 시원한 음료, 양 쪽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는 소리. 그런 감각의 가운데서 우리는 조용하지만 수다스러운 수다를 했다. 여전히 답이 없는 같은 질문의 반복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정감이 들었다.
몸은 힘들어도 단 음료를 마셨고 두 사람과 햇빛을 맞았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만한 하루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몸의 기운에 더 예상치 못한 단 음료의 습격은 맑은 날씨를 더 맑게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심심하고 나른한 세 사람의 만남은 예상처럼 느슨하고 즐거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을 때 그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몸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곤 하는데, 가끔씩 ‘어쩔 수 없어서 생긴 일’이 내게 도움이 되곤 한다. 오늘처럼 기운 빠진 몸에 더 달달한 밀크티를 마시게 되거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사람과 수다를 떠는 것뿐이었는데, 몇 시간의 수다로 딱딱하던 마음의 고름이 터져 개운해지거나. 어쩔 수 없어서 한 일들이 덤덤하게 날 감싸줄 때 자꾸 울고 싶어 진다. 이런 날들을 꾸준히 사랑하다 보면 어쩔 수 없던 일도 내게 화사한 햇빛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진 보냈어.
다리 아프다.
다음에 또 만나.
오늘 진짜 잘 잘 것 같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