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35 - 내 이름은 보부상

너 가방에 뭘 그렇게 많이 들고 다녀?

by 생강

35.


나는 보부상이다. 어디를 가든 (가까운 곳이든) 기본적으로 지갑, 손수건, 텀블러, 이어폰, 머리끈, 보조 배터리, 영양제, 장바구니, 핸드크림, 립밤, 반창고, 진통제, 소화제, 고양이 간식을 들고 다니는데 먼 곳을 가야 할 땐 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와 독서링을 챙기고 겨울엔 귀도리와 장갑, 비니도 추가해서 들고 다닌다. 나는 나를 보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내가 물건을 빌려주고 있었으므로 그때부터 스스로를 보부상 또는 짐꾼이라고 판단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작은 가방 보단 크고 널찍한 가방이 많고, 바닥이 넉넉한 에코백이 많다. 가끔은 내 방의 축소판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 같다. 나만의 구급상자 또는 비상시에 탈출할 수 있는 낙하산 같다. 묵직하면 묵직할수록 마음이 편안하고 마치 그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꽉 쥐고 걸을 때면 무엇이든 두렵지 않은 ‘무적’의 상태가 된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게 좋아. 예상하지 못한 일은 무섭고 버거워.


인생에는 알림장도 없고 준비물을 알려 주는 선생님도 없으므로 오로지 나의 감각으로만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때로 나를 무기력하게 한다. 생존의 감각 또한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그 감각을 장착하고 싶어도 획득하는 과정은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머리끈은 꼭 필요할 때에 내겐 없고, 체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날따라 음식을 급하게 삼켜서 소화제를 찾아봐도 내겐 없고, 금방 귀가하겠지 싶어서 보조 배터리를 챙기지 않은 날엔 온 동네 친구들을 다 마주쳐서 자리가 커지고 시간은 가고 배터리는 줄어드는데 충전기는 내게 없고. 그런 날들을 겪고 나니 그것을 한 번 더 겪고 싶지 않았고, 바깥에서 생존하기 위한 감각이 절실해졌다.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므로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버티기 위해 하나둘 준비물을 챙겨야 했고 그것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물건을 가득 넣은 가방의 무게만으로도 불안이 사라졌다.


어쩌면 나는 보부상이 되는 행위 자체로 안정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완벽해 보이는 나의 상태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완벽하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해냈을 때 나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남의 성취 같은 나의 성취, 완벽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 것 같다는 불안에 잡아 먹혀서 ‘완벽’이란 상태에 집착했던 것 같다. ‘결과가 완벽할 수 없다면 남들에게 겉모습이라도 완벽하게 보여야겠다. 뭐든 잘하고 뭐든 준비된 사람처럼 보이면 내가 아니라 상황과 결과를 탓하겠지. 그러면 그 과정에서 적어도 나는 보호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정말 자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긋난 방향으로 자라기도 했다. 다 보지도 못할 문제집을 잔뜩 챙기고 결국 한 권도 끝내지 못해서 후회하지만 문제집을 챙긴 행위만으로도, 문제집의 무게만으로도 만족하던 학창 시절의 나처럼. 나보다 문제집을 적게 들고 온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내가 좀 더 낫지, 하며 묘하게 그들과 선을 긋고 꾸역꾸역 스스로를 치켜세우던 바보 같은 나처럼. 그래봤자 그 아이들보다 열심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보이면 뭐하나. 실속이 없는데. 본질은 잊고 부풀린 행위에 의지하며 걸음 같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은 기분이다. 무엇이 낫고 무엇이 별로인 문제가 아니라 결국 내 불안을 잠재울 행위가 필요했던 것을, 꽤나 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지금은 정말 필요한 물건만 들고 다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니까.


없어서 곤란했던 물건은 곧바로 마련해서 들고 다니고, 들고 다녔지만 생각보다 필요하지 않았던 물건은 천천히 제외한다. 거르고 거르다 보면 내가 필요한 것, 본질만 남는다.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은 ‘없어도 괜찮다.’는 다독임의 한 마디이다. 내가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나를 헛 똑똑이로 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가끔은 남들에게 의지하며 물건을 빌리고 조언을 들으며 다정한 말들로 내 구석을 채우는 일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조금 더 느슨하게 사는 것이 유연하고 다부진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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