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44 - 기타를 사랑해

기타 줄에선 쇠 냄새가 나

by 생강

44.


전자 기타의 힘 빠진 소리를 좋아해. 쇠가 우는 소리. 구석에 처박혀서 자조 섞인 농담을 툭 내뱉고 지난날을 후회하는 것 같은 목소리. 그 소리가 좋아서 밴드 음악을 사랑하지.


십 년 전에 기타를 배웠어. 이 년 동안 기타 줄을 잡고 손가락 끝 부분엔 작은 굳은살을 매단 채 기타를 치는 그 순간을 온전히 사랑했지. 흥미란 이런 것이구나,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악보 한 장 한 장을 모아 구멍을 뚫고 링으로 고정시켜 나만의 연습장을 만들기도 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열정이었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사랑하지만 그때처럼 모든 힘을 쏟아부어 사랑하는 건 없다. 나는 그때와 다를 게 없는데 사랑을 주고받는 마음은 왜 점점 소멸하고 있을까. 어떤 것에 빼앗길 마음이 없어. 남은 건 딱딱하고 건조한 가짜 어른의 마음뿐이다.


그거 아니. 기타 줄에선 쇠 비린내가 나. 난 그 냄새를 참 좋아했는데. 얼핏 맡으면 피 냄새 같고 그게 나의 연습량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좋았지. 기타 몸통의 나른한 나무 냄새와 머리 부분에서 풍기는 쇠 비린내가 나를 통과하면 시간을 잊은 채 연주를 했어. 그땐 내가 음악 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더 배우고 싶다고 밀어붙일걸 그랬어. 내 방 한 구석에 외로이 서 있는 기타를 볼 때면 언제나 기회를 놓친 내가 생각 나. 무언가를 더 깊이 배우고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넌 알고 있니.


옆 자리에서 같이 기타를 치던 언니가 있었어. 선생님의 말을 적을 펜이 필요했는데 언니는 펜이 없었나 봐. 기타 케이스 앞주머니를 무안하게 뒤적거리더라. 나는 머리 부분에 하트가 달린 나의 펜을 건넸어. 사실 나는 펜을 한 자루만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적지 않고 있었거든. 언니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뿌듯해서 혼자 조용히 웃고 있었는데 언니가 그런 나를 보고 하나 남은 펜을 본인한테 준 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네, 하고 말하니까 언니가 너무 미안해하는 거야. 왜 있잖아, 고맙고 미안한 사람의 표정. 위아래로 움직이는 이마 근육과 찡그린 미간과 살짝 내려간 입 꼬리.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는 괜찮다고 했지. 그날 수업이 끝나고 언니는 내게 펜을 살며시 돌려주면서 나의 기타 연주를 칭찬해주었어. 같이 열심히 배워보자고 내게 웃으면서 말했었는데. 언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언니가 당차게 잡는 기타 줄에서 울리는 명료하지 않은 쇠 소리를 좋아했었는데. 언니는 내 기타 소리가 좋다고 했었는데. 우리의 꿈은 어디로 간 걸까?


매일 아침 청소를 하면서 검은 기타 가방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 털어도 털어도 쌓이더라. 아마도 내 미련이거나 하고 싶은 일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후회일 거야.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이 될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말이야. 가끔씩 기타를 꺼내서 피크를 쥐고 이 코드 저 코드를 잡고 연주를 하는데 지금 내 손가락은 굳은살이 없어서 쇠가 그대로 파고들어. 아프고 아리더라. 손가락에 아릿한 쇠 비린내가 남으면 아무래도 기타를 사랑하게 되지.


쇠 냄새에 절어 시절을 통과했던 그때의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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