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랑 싸우기 싫어
43.
어떤 말은 내 안에서 죽는다. 하지 못한 말을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상대방의 눈빛과 말투가 날 짓눌러서, 그 사람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어서, 내 입만 아프고 내 가슴만 찢어질 것 같아서, 결국 속상한 건 덩그러니 남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서 나는 많은 말을 깊은 내면에 잠가 두었고 나조차 쉽게 꺼낼 수 없도록 그날의 기분이나 기억을 머릿속에서 임의적으로 삭제했다.
다툼과 충돌은 나를 어지럽게 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선택적 기억 삭제였다. 나는 매끈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갈구했고 여전히 갈구한다.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은 나에겐 큰 힘이 드는 일이다. 싸우면서 힘을 소모하고 그 사람과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싸움의 시발점에서 백기를 든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고 그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삼키는 거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나를 대우해주는 사람이 좋다. 내가 싫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싸움을 통과해 서로를 더 알아가고 배려하는 결과가 도출될 수도 있다. 성숙한 대화는 그것을 가능케 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싸움이 싸움으로만 끝날까 봐 두렵다. 일단 내가 성숙하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내 안에서 여러 번 죽은 말과 마음,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감춰온 나의 진심이 한순간에 톡, 톡톡, 툭, 우수수수, 악취를 내며 쏟아질까 봐 무섭다. 그래, 나는 당신이 놀라서 날 떠날까 봐 무섭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어서 당신이 좋고 당신이 싫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정말 당신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우리 사이에 뾰루지처럼 튀어나온 이 문제를 잘 찢고 짜내서 아픈 흉이 남더라도 아물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 같다.
어떤 말은 내 안에서 죽고 껍질만 남아 내 안을 부유한다. 길을 찾지 못해서, 내 입을 떠나 누군가에게 전달되거나 누군가의 얼굴이든 손이든 발이든 그에게 찰싹 붙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승천하지 못한 영혼처럼 내 안에서 고요하게 돌아다닌다. 어떤 날엔 그 모든 말을 긁어내고 싶다. 바닥에 껌처럼 붙어 삭아버린 말도 있고 등을 대고 고개를 숙인 채 죽은 말의 시체도 있고 껍데기만 남아 흩날리는 말도 있어서 내 안을 탈탈 털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박박 긁어내고 싶다.
당신에게 내 심정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인데 그 말이 내 안에서 죽고 말의 시체가 쌓여 내 가슴이 답답해질 줄은 몰랐다. 내 안이 그렇게 문드러질 줄은 몰랐다.
이제와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내 선택에 내가 죽고 내 선택으로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어떤 말은 내 안에서 사라진다. 죽어서 사라지고 삭아서 사라지고 악취가 나서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나도 한 줌씩 야금야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