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45 - 소음

내겐 너무 시끄러운

by 생강

45.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


피곤해. 집에 가고 싶다. 방에 들어가고 싶다. 말소리가 들리거나 발소리가 들리면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타인에게 나의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묵묵히 고개를 박는다. 소음 속에서 밥을 먹어야 하면 나는 정말 밥만 열심히 먹고, 듣고 싶지 않은 대화 속에 일정 시간 갇혀 있어야 한다면 상대방의 미간이나 인중을 보고 벽지를 보고 천장을 보고 주변을 살피며 말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럴 때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그러나 내 앞에 앉은 타인들에게 최소한의 친밀감을 표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 소속되어 있지만 당신들의 이야기는 한쪽 귀로 흘려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자극적인 상황으로부터 나의 시각과 청각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하고 예민해서 최대한 당신들을 보거나 듣지 않는 쪽으로 생존하고 있다. 입 안에 굴러다니는 말을 사탕 굴리듯 혀로 쓸며 나의 에너지를 아낀다. 내가 아는 나의 처절한 생존 방식, 그중 하나이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내 귀에 들리지 않으면 나의 예민함은 사그라들까? 아니, 전혀 아니다. 벽이나 문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고 해도 나는 바깥의 타인에게 신경을 쏟는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모든 신경이 벽과 문을 뚫고 상대방에게 쏠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너와 떨어져 있어도 너의 눈치를 본다, 이 정도로 설명이 가능하다. 길게 말하자면, 너는 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혹시 모르지 나는 네가 나의 행적이나 행동의 당위성을 물을까 봐 긴장하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의 타당성을 물어올까 봐 무섭고 그래서 나는 나의 일이나 행동을 너에게 설명하고 너의 인정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네가 나를 인정하면 내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기분이야 너는 내가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는 너의 시선과 말투를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어 그러니 너는 내게서 멀어지기 전에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주면 좋겠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정도.


그래서 나는 이 세계가 너무 시끄럽다. 나의 에너지를 지키려고 한 행동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는 그것을 다시 잘 해명하고 치료해줘야 하므로 계획하지 않은 에너지 소모를 배로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는 게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한다. 핸드폰을 새로 사면 배터리 소모가 효율적이다 못해 아주 느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 보조 배터리 없이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을 만큼 배터리가 훅- 줄어들지 않나. 지금 내 모습이 그렇다. 조금만 움직여도 조금만 말을 해도 지친다. 핸드폰은 곧바로 충천이 되지만 나는 나의 충전소를 찾아 밤마다 유랑한다. 언젠가 책 한 권이 나의 구원인 적도 있었다. 책을 읽고 충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하루를 살곤 했는데 가끔은 책 한 권을 집는 것도 힘이 든다. 어떤 날엔 요리에 꽂혀서 그야말로 부엌이 나만의 충전소가 됐는데, 귀찮음이 나를 좀먹을 때엔 그마저도 내가 파괴한 공간처럼 보여 부엌에 발을 들이지 않기도 했다. 모든 날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폐허 같은 마음이 시끄러운 세계 속에 사는 나를 더 지치게 한다. 그런 날엔 사람을 마주치지 않아도 기운이 소멸한다. 애초에 몸에 힘 자체가 들어가지 않는 날도 있다.


요즘은 일주일이나 길면 한 달의 시간을 잡고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 산 책 몇 권과 옷과 이어폰을 챙겨 떠나고 싶다. 내가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질리도록 봤던 시트콤을 다시 돌려봐도,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리하여 내가 나의 행동을 증명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절실하다. 지금 여기서, 아무도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당신들에게 쏟는 힘이, 나도 모르게 빼앗기는 힘이, 아깝고 애틋하다. 가끔은 타인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예민함을 위해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과 나를 잠시 분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그럴 필요가 있다. 벽과 문 사이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보고 있지 않는데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내가 나를 너무 피곤하게 해서 나는 잠시 떠나고 싶다.


나는 내게 너무 시끄러운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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