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46 - INFJ의 후회

소심하고 눈치 빠른 사람의 일기

by 생강

46.


나는 왜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못하나.


그건 먹기 싫어. 거긴 가고 싶지 않아. 그건 하고 싶지 않아. 요즘 나에겐 이런 말들이 가장 어렵다. 너 좋은 거 하자, 너희 가고 싶으면 가자, 이 말은 입에 아주 달고 사는데 정작 나 좋은 것은 잘 내세우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런 내가 안쓰러워서 밤새 울었다. 정신 차리라고 뺨도 내려치고 답답해서 가슴도 세게 두들겼지만 나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밤공기에 섞여 눈물을 말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나. 혼자 기대하고 혼자 삭히면서 우울해할 자격이 있나.


나는 내가 예민한 만큼 남들도 예민하길 바라는 걸까? 나는 남이 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게 편한데 그걸 왜 편하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나의 생각과 타인의 것이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니까 나의 취향은 오롯이 나의 것으로 타인의 취향은 타인의 것으로 존재하며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왜 항상 배제하고 대화에 참여하는 걸까? 부정이 두려운 걸까?


어릴 적, 눈치 없는 헛똑똑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언제나 어른스럽고 활발한 어린아이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실수를 하면 주변의 어른들은 나를 헛똑똑이라고 불렀고, 친구들은 가끔 나를 눈치 없는 애라고 부르기도 했다. 농담 식으로 던진 말들이 나에겐 트라우마가 되었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말이 가장 싫다. 눈치 없는 헛똑똑이. 나는 나름대로 당신들의 취향을 잘 맞춰줬는데 너희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나를 왜 평생 눈치 보는 사람으로 만들었어. 왜 밤새 울게 만들었어. 아이가 실수할 수도 있지. 아이가 어른의 세계를 모르고 물어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아이가 어른과 놀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 왜 여전히 나를 울리느냐고.


꽥 꽥 소리를 지르고 싶다.

듣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고 아파하는 사람은 있다.

울면서 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내가 여전히 눈치 없는 사람이 될까 봐 싫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분위기를 살피고 나만 빼고 모두 무언가를 하고 싶고, 가고 싶어 한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하자, 그냥, 가자,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식간에 무기력해진 나는 나의 기력 없음을 숨기려고 최대한 밝게 말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구역질이 난다. 나는 너무 거짓으로 살며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토악질을 하고 싶을 만큼 내가 싫어지기도 한다. 나중에 가서 누군가가 내게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내가 배운 인간관계의 방식이 최대한 나를 숨기고 상황에 나를 맞춰 눈치 없는 헛똑똑이가 되지 않는 것이라 그래. 이렇게 말할까. 말하면 나를 무슨 표정으로 쳐다볼까. 경멸할까. 비웃을까. 그마저도 헛똑똑이라며 놀림을 당할까.


눈 언저리에 휴지 조각이 묻었다. 눈물이 마르고 휴지도 말라서 휴지조각이 너무 건조해졌다. 건조해서 떼어내기가 힘들다. 눈을 비볐다. 한쪽으로 말린 휴지조각이 손바닥에 묻었다. 눈과 눈 사이가 메마른다. 눈물이 모든 수분을 데리고 떠났다. 울 힘도 없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다. 혀를 깨문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않아서 싫은 것을 모조리 떠안아야 했던 날이다. 싫은 것을 같이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나의 바람이었고 나의 냄새나는 욕심이다.


나는 타인을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나를 옥죄어 왔다. 이렇게 나는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재주도 있다. 너를 위해 선택한 일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어서 마음이 아프다. 나는 싫다.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못해서 싫다.


다리를 꼬고 앉았더니 오른쪽 고관절이 저릿하다. 무릎이 뻐근해진다. 마음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마음이 괴사하고 있다. 반쯤 감은 눈에 시리도록 피로가 쏟아진다. 울고 나니 더 피곤하다. 꿈을 꾸지 않고 숙면한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싫다는 말을 하지 않은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혀로 치아를 훑는다. 가장 뾰족한 송곳니를 찾아 혀로 짓눌러 뭉갠다.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 받는데 혀는 이런 자극엔 뚫리지 않네. 작고 하찮은 공격에도 스러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울음이 소진되었다.

내일은 내가 더 안쓰러워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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